어제는 왕이메 굼부리 안에 가서
활짝 핀 복수초나 만날까 했는데
갑자기 추워지면서 눈발이 날리는 바람에
보통 승용차는 접근도 못할뿐더러
햇볕을 받지 않고선
피지 못하는 꽃이라서….
지난 주에 약속하기를
오름도 돌볼 겸 다들 거기로 가기로 했었는데
할 수 없이 엉뚱한 곳으로 가서
반나절 눈밭 위를 헤맸다.
세상사란
아무리 강한 의지를 갖고 있드래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운 날이었다.
하여, 전에 찍어둔
완두콩 흰꽃을 옮겨다
우리詩 2월호의 시와
함께 올린다.
♧ 그리움의 현이 켜지다 - 성숙옥
높은 옥타브로 바람을 연주하는 겨울
호흡을 가늠할 수 없이 거칠게 다가온다
창틈이 부는 칼바람 소리를 따라
깔리는 아득한 어둠
푸른 밤의 악보에 도돌이표를 찍어
수직의 나무 사이를 건너는데
묵은 시간이 흑백의 불협화음으로 튀어오른다
겨울의 목젖이 바람의 감성을 내 귀에 꽃은 밤
넘기는 장마다 어둠이 스캔되는
밤의 그림자엔 스산함만 쌓이고
♧ 수평선 모텔 - 차영호
바로 코앞에서 바다가 남실거리는 방에
흰긴수염고래랑 함께 든 적 있지
둘이 팔베개하고 초근초근
겹주름위에 쟁여두었던 말씀들을 되새김질할 때
나이롱 화투장 팔 껍데기 같은 바다 위를 낮게
숨죽여 나는 낯선 건반
검은 해령海嶺을 가로질러
바다 몰래 바다 깊이 가라앉는 그 음계音階의 죽지를 겨냥하여
낚시채비는 내가 날리고
너는 손톱을 또각또각
젖몸살하는 동공瞳孔 속 파도 어느 이랑에선가
솟구쳐 오를
악상樂想
니 눈썹처럼 휜 저 수평선 너머
그랜드피아노 한 대
둥둥 화물선처럼 떠 있겠지
♧ 이명耳鳴 - 오명현
질주하는 차 엔진소리 요란하다
길 복판에선 까마귀 몇 마리
횡사한 살쾡이의 살점을 쪼고 있다
돌진하는 차는 안중에도 없는 듯
등에 진땀 배 브레이크 밟으려는 순간에야
날개 퍼덕이는 소리
까옥까옥 우는 소리
목백일홍 나뭇가지에 부리를 닦으면서
길 복판으로 향한 시선 거둘 수 없다
목백일홍 줄지어 활짝 핀 산길로
상여 한 채 지나고 있었지
지게에 나를 태워 춤사위로 놀다가
내처 그 산길 어지럽도록 달려서는
숨이 멎었나 싶어서야 멈추곤 하던
건넛마을 덕림 아재 저승 가는 날
하얀 소복 눈에 부시고
상엿소리 아스라이 고개 넘는데
까마귀 우는 소리도 따라 넘고 있었지
까마귀는 그 살점 다시 쪼고 있을 터인데
차는 새로이 확 트인 길을 질주한다
♧ 꼭이라는 말 - 김완
간절히 빌어본 사람은 안다
꼭, 이라는 말이 얼마나 절절한지를
둥지를 떠났던 새들이 창공에서
날아와 아침 숲에 안긴다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울긋불긋한 가을 숲을 보면 떠오른다
이번 가을엔 꼭 함께 여행가자는
꿈같이 달콤하기도 하고
안타깝고 간절하기도 한
꼭, 이라는 말, 참 아심찬하다
♧ 여유餘裕 - 정순영
말을 반만 하니
꽃이 반만 피어 어여쁘고
술도 반만 취해 거나하다.
말 자리에
말이 반이나 비어
풍경소리까지 들어와
님 그리는 산새가 애절하게 울음 운다.
세상에서 물러앉아
맑은 시냇물 소리로 귀를 씻으며
말을 반만 하니
생각이 반만 열려 여유롭고
가슴도 방만 열려 아늑하다.
♧ 금정마을에 가면 - 조성순
늙을 줄 모르는 그 향기
파쪽 미나리 사이에
조갯살 숨겨
파전에 산성 막걸리
그 맛 엄마손 그대로인데
밀밭은 푸르건만
누룩이 익어가는 유월
머리는 파뿌리 되어 만나니
한마디
파밭은 예나 변함이 없네 그려
천 마리 거북과 만 마리 자라가
잘 살고 있는 금정마을
인정을 띄워 감치는 그 맛
따끈한 반세기의 이음이라.
♧ 집사람 - 홍해리
- 치매행致梅行 * 86
집은 그런 것이었다
아픔이라고 또는 슬픔이라고
무슨 말을 할까
속으로나 삭이고 삭이면서 겉으로
슬쩍 금이나 하나 그었을 것이다
곡절이란 말이 다 품고 있겠는가
즐겁고 기쁘다고 춤을 추었겠는가
슬프고 외로웠던 마음이
창문을 흐리고
허허롭던 바깥마음은 또 한 번
벽으로 굳었을 것이다
아내는 한 채의 집이였다
한평생 나를 품어준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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