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과 함께 우수(雨水)가 지나가 버렸다.
작년에 음력 윤달이 있다가 보니
음력 날짜가 늦어진 탓이다.
어제는 날이 따뜻해서
아이들 데리고 모처럼
조상들 무덤을 찾아 간단한 차례를 지내고
절도 들리고
아이들 외가랑
동서 집을 들르고 왔다.
절기가 이르다보니
질펀하게 푸르러버린 보리밭,
어떤 밭은 웃자라기까지 했다.
올해도 풍년이 되려나 보다.
♧ 우수(雨水) -박덕중
견고한 마음 다독이며
작은 불씨 하나로
한 시대의 살얼음 길목
어둠에 싸여 안으로만 울던
풀씨들,
당신의 거룩한 눈물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죄없이
한 동안 칼바람에 강타 당하고
메마른 눈물 삼키며
머리 끝 화관을 쓰고자
떨며 몸부림치며
차가운 하늘 아래 눈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늘 당신의 체온을 기다려 왔다
이제 어깨를 펴고 가슴을 펴고
눈물의 세례 받고
어둠을 젖히고 깨어나
눈을 뜨고 새로운 세상을 본다
당신은 한 동안 우리에게
차가운 고난을 주시다가
가엾은 마음 어쩔 수 없어
이렇게 봄을 주시는가
닫혀진 마음들이
이제 창을 열고 나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심지에 불을 켜들고
푸르게 달려 가리라
♧ 우수절(雨水節) - 위선환
남쪽에 내린 비가 땅을 적시며 올라오더니 내다보이는 길바닥이 척척해졌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머뭇거리는 빗발은 차고 비를 맞지 않아도 나는 목덜미가 식는다. 비는 어둡도록 내리다가 굵은 빗소리를 두드리며 문득 들어서는 것이므로 문을 잠그지 않는다. 작은 뜰을 잠깐 적시고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흐르고 빗물 뚝뚝 흘리면서 들어와서는 여러 겹으로 젖은 제 몸을 한 겹씩 벗어 내리는 것인데, 빠진 발톱 두엇도 집어내고 반 넘게 센 머리칼을 헤집어 털고 그리고는 내 팔을 끌어다 베면, 간 겨울에는 참 많이 야위었구나, 뼈마디가 잘게 걸리는 등허리에서 매만지는 손가락이 마르고 속울음 깨물며 울고 어깨가 얼어서 떨면서 비는 춥다. 어쩌겠는가. 조심스럽게 내 가죽을 벗어서 빗줄기를 덮고, 깊게, 더 깊은 안으로 끌어안는 밖에.
♧ 봄날 보리밭에 서면(427) - 손정모
겨울 냉기
미풍에 바스러져
하얗게 흩날릴 때면
가슴으로 밀려드는 안타까움
색채도 형상도 없이
아지랑이 곡예 넘는
능선 보리밭 지나
꿈의 밀어로 휩쓸린다.
동풍 불면 서쪽으로
남풍 일면 북쪽으로
휩쓸려 수파(水波) 이루는
보리밭에 가만히 다가서면
관념에 묶여 망설였던
가지 못한 노정(路程)
안타까운 한숨이 되어
무형의 기류로 흩날린다.
♧ 보리밭에서 푸른 산을 보며 - 랑정
저 푸르른 산은 그냥 신록의 산빛이 아니다 저것은 생명의 빛이다 저것은 우주의 빛이다 가슴 설레게 하는 우주 생명의 감동의 빛이다 아 저 놀라운 산의 생명이여 무너지지 않는 우리들 생명이다 제대로 푸르른 산빛을 닮아가는…… 저 장엄한 푸르름 아 거룩한 부처의 모습이로다
♧ 청 보리밭에서 - 한휘준
푸른 보리밭에는
싱그러운 너와 나의
풋풋한 그리움이 자란다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너를 향한 사랑이
빗물처럼 흘러내린다
너의 풀꽃같이 영롱한 눈망울엔
순수한 소녀 같은 미소가 흐르고
때 묻지 않은 풋내음이 묻어난다
푸른 보리밭에는
빗물이 흐르고 흘러도
씻겨져 번지지 않는 한 폭의 수채화가
은은한 들꽃향기처럼
헤이즐넛 커피 향처럼
내 발길을 유혹하고 있다
♧ 청 보리밭에서 - 반기룡
청보리밭 홀로 걷는데
사금파리 번쩍 빛나며
생전의 할머니처럼 환한 미소로 응답하네
겨우내 모진 폭풍 한설 온 몸으로 껴안고
긴 긴 겨울밤을 인내와 뚝심으로 버텨 온 여정
줄무늬 가슴마다 흥건히 펼쳐지는 녹색물결
새 생명 고이 간직한 채
이랑마다 잉태의 푸른 꿈을 키워왔네
힘껏 밀어 올리는 뿌리의 힘으로
고개 드는 저 푸른 잎
슬몃슬몃 도리질하며 세상구경 실컷 하네
둘레둘레 바라보아도
푸른 벌판만 가득하고
푸른 소리만 왁자한
때 묻지 않은 풍경이
너의 실체임을 터득하였으리
청보리밭 걸어가다
사금파리처럼 반짝 빛나는
철학 한 소절 배우고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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