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저 많은 감귤을 어쩔거나

김창집 2015. 12. 18. 23:59

 

오늘은 감귤박물관이 있는

월라산과 그 아래 예촌망 오름엘 다녀왔다.

 

금년은 이상하게도 이틀 건너 비가 내리다 보니

따지 못한 밀감이 아직도 많다.

 

거리마다 감귤 상자를 실은 트럭이

그냥 세워져 있다.

 

비가 와서 따지도 못하고

출하도 하지 못한 채

찬바람에 맞아 부풀며 썩어가고 있다.

 

따 봐도 팔지 못하고, 설령 판다 한들 값이 안 나가

인부 품삯에도 못 미친다고 한다.

 

그래도 내년에 감귤 수확을 하려면

저걸 다 따서 수세(樹勢)를 찾아야 할 텐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농부의 가슴만 탄다.

 

아, 어쩔거나 저 많은 감귤을,

그래도 중국과의 FTA는 막무가내로 진행되어가고

농산물은 저렇게 썩어 가는데….

 

 

♧ 귤 - 나태주

 

시장바닥에 흐드러지게 나와 팔리는

귤을 보면 슬퍼진다

옛날에 그 귀하던 것이 저러이

흔전만전 나와 푸대접을 받고 있구나

저것들 키운 농부의 노고는 오죽했으면

저것들 팔기 위해 떨고 있는

아주머니의 추위는 또 얼마나 모질었으랴

더구나 저것들 키운

제주도의 햇볕은 얼마나 또

빛나고 눈부셨으랴.

   

 

♧ 부패 - 안재동

 

며칠 전 사들여 베란다에 두었던 밀감 한 상자

온 가족이 수시로 몇 개씩 집어먹는다

 

먹을 때마다 때론 좀 남겼다가 아껴먹어야지 한다

 

어느 날 보니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밀감

먹으려고 집어들다 보니

몇 개씩이나 껍데기에 허부옇게 보기 싫은 뭔가 생기면서

안쪽으로 농해 들어가고 있었다

많이 농한 것들도 있고 시작단계인 것들도 있다

 

아이쿠, 이거야말로 아끼다가 X 됐네

 

사과나 배 같은 다른 과일도 오래 두면 마찬가지

사람 먹는 음식은 어떤 것이든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오래 두면 상하다가 썩다가, 결국은 내버려야만 하는 것

여차 하단 먹지도 못하고

 

근데, 먹어도 먹어도 느낌 없는 것들이 있으니

두어도 두어도 농하지도 썩지도 않는 것이 있으니

그 이름 돈과 보석과 권력이로세

 

소화되지 않아 위장 망가지더라도 더 먹고 싶은 것

아무리 무거워도 더 껴안고 싶은 것

기둥이 흔들리는데도 더 높이 올라가고 싶은 것

 

세상엔 정작 가장 빨리 썩어버려야 할 것들이 가장 오래

건재할 때가 있다

그들 앞에서는 결국 사람이 먼저 썩고 마느니

좋은 이나 나쁜 이나

 

 

♧ 귤 향기 같은 사람 - 조찬용

 

이가 시리도록 바람도 칼날을 물었다

겨울이 고드름으로 익은 날

귤 향기로 사람들을 보내고

귤 향기로 떠나보낸 사람들을 맞이하는

정거장 같은 사람이 있다

가끔은 그가 보고 싶어 전철 역사에 간다

그보다 뜨겁게 행복을 운전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어둡고 음울한 그림자가

허리띠를 조이는 날이면

매운바람에 서 있는 정거장엘 간다

뜨거운 것이란 누구에게나 흐르는 핏줄의 함성이언만

태어나 더듬이가 망가지고 어눌한 걸음 그 바람 속으로

걸음을 옮기고 둥지를 트는

홀로 있어도 시들지 않는 뜨거운 인생

나도 그처럼 뜨거워지고 싶어

그가 사는 들판의 역사로 간다

웃음이 줄지 않는 그의 인사가 뜨겁다

차가운 세상에 귤처럼 속이 얼지 않고 향기가 나는

그는 분명 이 겨울의 주인이다

제 인생 하나 뜨겁게 붙잡지 못하는 내 겨울을 생각하면

그는 내가 쉴 정거장이고 향기다

내 속도 귤처럼 벗기면 향기가 있을까

 

 

♧ 귤나무 하나 - 정민호

 

귤나무에 귤이 열렸다.

겨울의 눈보라를 참고

여름의 따가운 햇살을 견뎌온 수삼년數三年,

겨우 한 개의 열매가 달렸다.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데

바다를 건너 온 제주산濟州産 귤나무가

제주의 파도소리가 출렁이는

탱자가 아닌 귤이 열렸다.

너를 보기 전에는

평범한 한 그루의 나무,

네가 있으므로 너는

귤나무가 되었다.

겨울의 눈보라를 참고

여름의 따가운 햇볕을 견뎌온 수삼년數三年,

귤나무에 한 개 귤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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