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자락에 다녀왔다.
높은 지대를 제외하고는 눈이 많이 녹았다.
고도 1000m 안팎에서 자라는 겨우살이들이
잎이 떨어진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숙주나무 잎사귀로 가려져 존재를 모르던 것이
이제는 차디찬 겨울바람에 몸을 맡기고
겨울을 날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건강에 좋다는 바람에
막무가내로 채취해버려 수난을 겪고 있다.
‘겨우살이’는 겨우살잇과에 속한 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겨우살이, 꼬리겨우살이, 동백나무겨우살이, 참나무겨우살이 따위가 있다.
겨우살이는 상록기생관목으로 암수딴그루인데,
참나무류, 물오리나무, 버들, 팽나무 등에 기생한다.
잎은 마주나고 바늘 모양으로 잎자루가 없으며,
가지는 둥글고 황록색이다.
꽃은 3월에 가지 끝에 황색(黃色)으로 피고
열매는 둥글고 10월에 노란색으로 익는다.
줄기와 잎은 한약재로 쓰이며,
우리나라, 중국, 일본, 타이완,
만주, 유럽, 아프리카 등지에 분포한다.
♧ 겨우살이 - 김승기
살아있는 모든 것 다 말라버리게 하는 겨울가뭄
몰고 온 강추위가 날마다 가슴을 할퀴는 세밑이다
하늘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목마른 겨울
언제 발작할지 모르는 현기증 누르며 겨우 버티고 선 나무들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바람만 홀로 스트립쇼를 벌이는 산꼭대기
영양실조 걸린 참나무 가지 끝에
겨우살이 파랗게 둥지를 틀었다
연노랑 구슬 방울방울 햇빛에 반짝인다
스스로 광합성을 하면서도 남의 몸을 숙주로 삼아 뿌리박고 물관을 막아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죄다 빨아들이는,
서로 주고받는 공생이 아닌
착취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게 아니라 아낌없이 빼앗는 거라고 울부짖는 너
네 사랑은 또 누구에게 빼앗기려고 그렇게 악다구니로 몸부림치는가
지금껏 이해를 못했다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걸어온 길 돌아보면
나야말로 그리 살지 않았나 싶은,
겨울초입에 들어선 내 나이
영하의 추위 속에서
꽁꽁 얼어붙은 온몸으로
너의 집착에 주목한다
♧ 겨우살이 - 최범영
강원도 화천 철책선 도로 낼 때
꾸불텅 참나무에 봉황 같던 겨우살이
바윗돌 다듬어 방벽 쌓던 비리비리 사령관
몇 번이나 안쓰러워했을까
오를레앙 샘골 숲 속에 새집 같던
연두빛 손, 빨간 눈망울의 겨우살이
밤새 숙제해서 파리로 학교 가던
보라색 점퍼 옷을
몇 번이나 눈곱 떼고 보았을까
통일전망대 가는 간성길
덩굴 옷 입은 나무에 귀신같던 겨우살이
군인들 앞세우고 지뢰밭 피해
산속 억새밭 헤집던 산적을
몇 번이나 지켜보았을까
한겨울에 강원도에서 따다 말린 것이다
형은 몸에 좋다 끓여먹으라
겨우내 살아남는 겨우살이 되라
말린 겨우살이를 내놓으며
몇 번이고 날 북돋워주는데
♧ 백담사 가는 길 - 한도훈
겨울 백담사 가는 길에
나그네 눈을 만났다
내 발치에 쏴아 쏟아지는
눈빛은 환하게 빛났다
백담사 계곡 휘돌아 가는
상큼한 물빛만큼이나 빛났다
더러 바위들이 성이 난 채
고추 서서 노려보고
겨우살이들이
노란 속살을 드러내며 미소 짓지만
백담사 가는 길은 멀었다
그래, 나그네 눈은
세파에 찌든 내 눈꼬리를
반성하라며 세차게 때렸다
거친 눈발로 지근지근 밟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었다
겨울 백담사 가는 길에
다람쥐 가족 일행도 만났다
먹이 없는 하늘로만 오르는
다람쥐 가족에게
미안타 미안타 골백번 사죄하고
나그네 눈의 팔짱을 꼈다
저녁이 산그리메를 던져올 때쯤
백담사는 저만치 혼자 서 있었다
♧ 미쓸토 · mistletoe - 유봉희
* 더부살이
십이월도 중순
늙은 사과나무가 푸른 너울을 걸치고 있다
미쓸토가 사과나무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남의 살갗을 뚫고 앉아 지켜야 하는 생
십이월의 매몰찬 비가 오히려 시원하다
어찌 보면 가는 미역 줄기 같은 가지에
있는 듯 없는 듯 피던 꽃들을 떨구고
지금은 흰 낟알 같은 열매를 달고 있다
그것은 차라리 눈물일까
새 혀 같은 잎들은 찬비로 목을 추긴다
* 크리스마스
미쓸토가 빨간 리본을 달고
문설주에 앉아 있다
그만이 허락할 수 있는 키싱 타임을 기다리며
토막 난 참나무가 벽난로에서 큰소리를 내고 있다
크리스마스트리 위에는
몰래 숨어 들어온 별 몇 개가
차가운 몸을 녹이고 있다
그때 누가 문을 연다
장식장 위에서 졸던 촛불들이 후닥닥 잠을 깬다
저기, 얼굴 붉히며 한 청년이 다가오고 있다
어여쁜 아가씨에게로
미쓸토의 빨간 리본이 더욱 붉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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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stletoe(겨우살이) : an evergreen shrub that
grows as a parasite on trees and produces
clusters of white berries in winter
♧ 바람도 시리다 - 조철형
머무르면 아프고
지나가면 고독을 불러오는 너
어루만져 잡으려면
어느새 형체 없는 상념으로 변신하여
겨우살이 같은 푸르름으로 육신을 감고 돌아
이성을 지배하는 미소
바람을 가슴에 가득 안고도
시리지 않은 임은 행복한 사람이다.
♧ 겨우살이 - 정진혁
생선을 토막 내는 비릿한 손도
겨우살이를 팔아 겨울을 나는 사내도
겨울 장바닥은 서럽지만
거친 손과 쉰 목소리는
살아 꿈틀대는 가물치를 닮았다
장바닥 소리들은 가슴에 겨울나무를 품었다
모란 시장 장바닥에서
처음 너를 만나 반갑다가
흙에서 싹트지 않는 씨
씨를 가지고 참나무 가지에서 자라는
너는 나무가 아니다
떳떳하지 못한 세월 자란 저 잎 속에 내가 있다
아내의 피곤함에 뿌리 내리고
기생하는 나는 사람이 아니다
무능력이 오래된 뼈를 드러내며
팔다리 관절이 아파 온다
엑스레이 사진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실업의 날들이
닳아빠진 관절처럼 시려온다
아직도 파랗게 위장을 하고
내 속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얼굴
겨울에도
참나무 잎 다 진 곳에
파랗게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저 얼굴이 불편하다
♧ 겨우살이 - 제산 김대식
땅 위에 뿌리내리고 홀로서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약한 줄기로 홀로서기엔 땅은 너무 힘겹지
힘 있고 든든한 줄기 하나 힘이 된다면
그 힘으로 생명줄 삼아도 나쁘진 않을 터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붙어야만 살아남는 것
산다는 건, 살아간다는 건
남의 희생 위에 내가 사는 것
어쩌겠니? 남의 덕도 보아야지
여름 강한 햇살까지야 어떻게 바라나
큰 나무 그늘에 가릴 수밖에
붙어사는 신세도 염치없는데
남겨진 겨울 햇살만이라도 감지덕지
추위 정도야 스스로 이겨야지
찬바람 된서리야 각오했던 것
내 땅 하나 없이 살아가는 게
어찌 쉬우랴
남의 힘으로 생명 하나 부지하는 일이
어찌 쉬우랴
---
*겨우살이 : 다른 나무에 기생하여 사는 식물로 사계절 푸른 잎을 지님.
♧ 겨우살이 - 원영래
하루살이에게
어찌 사느냐
묻지 마라
대답하는 순간조차
그에게는
천금이다
삶이 고단한
그대여
하루하루
겨우산다고
말하지 마라
나목 앙상한
참나무가지 끝에 매달려
혹독한 겨울밤
의연히 지새는
겨우살이를 보라
매운 겨울바람 속에서
황금빛 찬란한
열매를 잉태한
겨우살이는
결코
겨우산다고
말하지 않는다
칼바람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치열한 꿈을
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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