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자국 - 나병춘
내가
너를 업고 간 자국
두 발 짐승이
걸어간 자국
한 발 한 발
우주를
들었다 나온
저 엄청나고
가벼운 무게
물끄러미 내다보네
아무 생각 없이
네 발자국
성큼성큼 달려간
강아지 발자국
♧ 삽 - 민구식
외진 벽 한 켠에 꼬리뼈 금간
삽 한 자루 우두커니
모난 날 둥글게 견뎌내고도
수행이 모자라 비켜선 자리
얼마나 오랜 세월 허리를 굽혔던가
파낸 땅이 산만큼 크고
날에 잘린 뿌리들 물길만큼 긴 업보業報
착하게 닳은 곡선이었어도
부삽으로 쓰일 늘그막
아무리 유순해져도
딱딱함은 천성
얼마나 많은 뿌리들의 희망
끊어버린 날에 금이 갔다
오후의 바람벽에 기대 선 외발
자신의 키를 묻을 잔업殘業의 날들을 꼽으며
수의壽衣처럼 드리운 그림자
얇아진 고집이 버티고 있다
♧ 별국 - 공광규
가난한 어머니는
항상 멀덕국을 끓이셨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
흰 사기그릇이 앉아있는 밥상을
조심조심 받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
국물 속에 떠 있던 별들
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
배가 불렀다
숟가락과 별이 부딪히는
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
어머니의 눈에서
별빛 사리가 쏟아졌다
♧ 초봄 - 송문헌
겨우네 얼어붙었던 인적 없는
물소리 청량한 고대산 자락
새싹이 돋나 싶었는데 그새
산 벗꽃 진달래 흐드러지고
짝을 찾는 산까치 구애 소리
살랑이는 산 버들가지 꽃잎이
수줍다 미소 짓는 날머리,
무너져 내리는 빈 집에 홀로
웅크리고 흐느끼는 고양이
울음소리 가슴을 시리게한다
---
*고대산 : 경기도 연천에 있는 남한 최북단 산,
정상에 서면 휴전선 넘어 이북이 아련히 보인다.
♧ 설중매 - 이산
바람도 얼어붙은
빈가지
침묵 속에
달빛은
더 외로워
설밥만 쌓이는데
빙벽의
시간을 깨는
홍매 향은 깊어라
♧ 외도外道 - 채영조
봄날은 외도가 잦다
화사함에 무장해제 당하여
벚꽃과 바람 피우다
집으로 돌아갑니다
오늘은
어떤 년과 놀았냐고
아내에게
혼쭐이 나겠네요
아주 태연하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하며,
몰래 따라온 꽃잎
가슴에 품고
이불 속으로 스르르 들어갑니다
봄은
이불 속에서도 피어납니다.
♧ 눈 내리는 밤 - 황서희
한잔 맥주를 마시고
심란한 영화를 봤다
팝콘을 먹는 동안
하얗게 쌓여갈 굽은 골목이
무릎을 쑤셨다
심야에 뛰쳐나온 눈처럼
팝콘을 쏟아내며
꺾었던 무릎을 폈다
졸음처럼 쌓이고 녹을
거리낌 없는 약속들
한잔 마시고
한때를 걷고 있었다
♧ 두 개로 나누어진 세계 - 라윤영
사랑을 사탕이라고 말하면 안 되나
계절을 먹어치운 입술과
다른 시간의 풍경이 어제처럼 도망간다
바닥의 꿈이 다리를 벌리고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진다
충분히 가벼워지는 백합
여자처럼 옷을 벗고 누워 있다
나는 듣고 있다
당신을 만나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어요
가난한 웃음이
마른 풀잎의 계절을 지나
헤어지는 서쪽으로 넘어진다
우리는
두 개로 나누어진 세계
나는 조금 기울어진다
조도照度의 구름 속으로 스며든다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詩' 5월호의 동시 (0) | 2016.05.06 |
---|---|
'우리詩' 5월호와 백작약 (0) | 2016.05.05 |
'우리詩' 4월호의 시와 남방바람꽃 (0) | 2016.04.08 |
'우리詩' 3월호의 詩 (0) | 2016.03.21 |
권경업 시인의 봄꽃 시편 (0) | 2016.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