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애월문학' 7호의 시와 누리장나무

김창집 2016. 7. 24. 00:38



이별 연습 - 강연익

 

어둠을 끝내고

아침 해가 떠서 가는 시간

머물다 다가서는 노을에 묻혀

소멸해가는 내 모습을 본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보낸 시간

머물다 세월에 묻혀버린

그림자 없는 내 모습을 본다

 

하루를 끝내고 찾아오는 어둠 속에서

그 때의 고통과 기쁨과 슬픔이

내 안에 꼭꼭 숨어서 나오질 못한다

 

태어나서 소멸하는 자연의 법칙

나는 지금쯤 어디에 왔을까

모든 게 멈추어 내가 떠나는 날에

나 손 흔들며 떠나리라

 

사랑하는 그대들에게

그 동안 고마웠다고

빚진 게 많았다고

행복했노라고 손 흔들며 떠나리라.

     

 

밀항선은 25시에 떠나네 - 김성주

 

오사카로 가는

밀항선은 25시에 떠나네

 

정뜨르비행장으로 끌려간 아비

이호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쓰러진 어미

둘둘 말은 총소리를 품고 큰아버지가 떠나네

 

월남으로 가는

군함은 정오에 떠났다네

 

가슴에 매달릴 훈장보다

통장에 찍힐 숫자의 꿈을 품고

태극기의 물결을 누비며 작은아버지는 떠났다네

 

오사카로 가는

밀항선은 25시에 떠나네

 

그 사내

천둥번개의 밤바다에 재물이 됐다고

이쿠노쿠 뒷골목 공장에서 손가락 두 개 잘렸다고

북송선을 탔다고

총알 탄 소문들이 나를 조준하네

 

하롱베이로 가는

비행기는 정오에 떠난다네

 

베트남 정글을 누비던 맹호

여지없이 쓰러지던 사냥감들

 

오사카로 가는

밀항선은 25시에 떠나네

     

 

기다리며* - 김영란

     --정방폭포에서

 

깊고 푸른 그 밤에

동백 지던 그 밤에

주먹밥 한 덩이가

이별이던 그 밤에

하얗게 부서져 내리네

눈물 같은 뼛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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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명복의 아크릴릭화 제목

   

 

 

가마우지 - 김윤숙

 

목울대 뱉은 내 새끼 다 어디로 갔을까

 

둥지로 날 수 없어 홀로 앉은 갯바위

 

바닷가 해무로 피는 봄

 

슬픔을 다 가둔다

     

 

흰둥이 검둥이 - 순동 김종호

 

오름을 오르려고 새벽을 걸을 때에

동구 끝나는 외딴 집, 흰둥이

컹컹 반갑다고 소리친다

젖먹이 적부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더니

가는 길 오는 길에 한사코 나를 붙든다

모르게 발소리를 끄고 걸어도

속내를 빤히 아는 녀석 어김없이 소리친다

한참을 쓰다듬어주어야 통과 시켜준다

 

오름을 내려와 해안도로를 걸을 때에

중국산 검둥이, 송아지만한 검둥이

크락샤 건물만큼이나 시커멓게 컹컹댄다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데

하루 종일 쇠사슬에 너무 외로워

내 어깨에 발을 걸고 몸부림을 친다

도둑놈처럼 시커먼 검둥이

여우처럼 아양을 떤다

멀어지는 냄새를 쫓아오는 소리

컹컹컹 외롭다, 외롭다 한다.

 

나는 전생에 개였는지도 몰라

흰둥이 검둥이가 꼭 피붙이 같다.

   

 

 

유목 - 문순자

 

사골국물 우리는 해장국집 한 뼘 뒤란

누가 씨받았는지 제 한 몸 다 휘도록

기우뚱, 참나리꽃이

화끈하게 피었다

 

어디서 흘러왔나, 점박이 도둑고양이

화분에 납작 엎드려 내 눈치를 살핀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모른 척 눈감아준다

 

내 몸을 떠돌다가 엉덩이에 잠시 머문

유목의 흔적 같은 몽고반점 사라진 지금

점박이, 저들도 분명

흘러가는 생()이겠다

     

 

인연 - 박우철

 

티끌만도 못한

인생

그 인연

너였으면 좋겠네

 

아닌 게 아니라

오직

그 인연

너였으면 좋겠네.

 

 

 

낫 한 자루 - 변성언

 

음습하게

가려졌던 민 얼굴을

불쑥 내밉니다

 

녹슬고

이 빠진 이 얼굴도

 

한 때는

이마를 그을리며

세상을 호령했을

 

큰 주인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