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가 잠을 쫓는 시간에
지난 7월 12일에 찾았던 강천산,
아름답고 시원한 숲길에서 찍은 사진을 정리하다가
시냇물 사진을 뽑아,
한택수 시인의 시집
‘숯내에서 쓴 여름날의 편지(나남시선 81)’에서
시 몇 편을 골라 같이 내보낸다.
한택수 시인은
1985년 <심상(心象)>을 통해 문단에 나와
시집/지구의 끝 서쪽
시집/무지개
시집/숯내에서 쓴 여름날의 편지
시집/괴로움 뒤에 오는 기쁨
시집/그리고 나는 갈색의 시를 썼다
시집/폭우와 어둠 저 너머 시
동시집/바다의 엄마
동시집/머리가 해만큼 커졌어요
등이 있다.
♧ 헌사(獻詞)
나를 알고 싶어
숯내 여울 가에 와 있습니다.
삶과 빗방울이
급한 물길을 만들면서
더러 흙빛으로 흐르곤 했습니다.
시를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긴 편지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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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내(탄천炭川) : 경기도 용인시 구성면 청덕리 계곡에서 발원하여 성남시를 거쳐 한강으로 흐른다.
2. 인간은 하나의 도구이며
인간은 하나의 도구이며
작은 항아리와 다름없는 이 육체는
곧 깨어질 것이라고,
나는 친구에게 편지를 썼어요.
암흑 같은 망상이 찾아왔을 때는
이미 청춘의 무더운
여름이었어요.
봄이 가고 여름이 온 것이지요.
강과 나무는 춤을 추었지만
새들은 하늘을 건너 다녔지만
내겐,
항아리처럼 작은
내 인생이 있었어요.
6.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하고,
한참 멈춰 있습니다.
달과 별이 내 곁을 흐르던 날들이
내겐 있었습니다.
산과 강이 내 그림자 되어 비치던 날들이
내겐 있었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했습니다.
또 편지 올리겠습니다.
8. 떨어지는 이슬에
떨어지는 이슬에
맺혀 있는 말들,
사랑합니다,
아름답게 살고 싶습니다,
가을이 저 멀리에 있어서
가까이 들리지 않는 그대의 말들을
새여,
노래하는 이여,
나는 한 방울의 이슬이었습니다.
밤이었습니다.
9. 기도하면서
기도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먼 그리움을
고백할 수 있을까요.
내가 갖고 싶은 건
듣고 싶은 건
한 줄의 시,
바람에 쓸리며 붙어 있는
푸르른 날을 기억하는
잎사귀의 언어,
내 몸에 가까이 붙어 있어서
떨치고 싶던 욕망들
햇볕을 받던 욕망들을 뒤로 하고
기도하면서
시를 써요.
12. 내 딸은 멀리 가 있어요
내 딸은 멀리 가 있어요.
강과 바닷물을 건너
겨울 저편에 가 있어요.
그곳엔 낮과 밤이,
역사와 사건이
들리지 않는 곳이에요.
새들이 날아들어
아침을 전하는 언덕,
꽃잎이 피면
꽃잎 하나 먹고
숨을 익히는 곳에
내 딸은 가 있어요.
19. 사랑의 속살을 찾듯
사랑의 속살을 찾듯
산을 더듬듯
걸어 올라가 봅니다.
산이여,
오를수록 높기만한
시의 숲이여,
말들의 잎새여,
가느다란 흔들림이여.
사랑의 속살을 찾듯
가만히 읽는
나여.
25. 나 여기 서 있겠어요
나 여기 서 있겠어요.
꽃 피는
꽃나무처럼요.
눈비 그친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 비치던
삶,
서러운 생애(生涯) 한쪽에
망울지던
시,
나 여기 오래도록 서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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