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숯내에서 쓴 여름날의 편지 - 한택수

김창집 2016. 7. 25. 00:00


열대야가 잠을 쫓는 시간에

지난 712일에 찾았던 강천산,

아름답고 시원한 숲길에서 찍은 사진을 정리하다가

시냇물 사진을 뽑아,

한택수 시인의 시집

숯내에서 쓴 여름날의 편지(나남시선 81)’에서

시 몇 편을 골라 같이 내보낸다.

 

한택수 시인은

1985<심상(心象)>을 통해 문단에 나와

시집/지구의 끝 서쪽

시집/무지개

시집/숯내에서 쓴 여름날의 편지

시집/괴로움 뒤에 오는 기쁨

시집/그리고 나는 갈색의 시를 썼다

시집/폭우와 어둠 저 너머 시

동시집/바다의 엄마

동시집/머리가 해만큼 커졌어요

등이 있다.

   

 

 

헌사(獻詞)


나를 알고 싶어

숯내 여울 가에 와 있습니다.

 

삶과 빗방울이

급한 물길을 만들면서

더러 흙빛으로 흐르곤 했습니다.

 

시를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긴 편지를 씁니다.

 

---

*숯내(탄천炭川) : 경기도 용인시 구성면 청덕리 계곡에서 발원하여 성남시를 거쳐 한강으로 흐른다.

     

 

2. 인간은 하나의 도구이며


인간은 하나의 도구이며

작은 항아리와 다름없는 이 육체는

곧 깨어질 것이라고,

 

나는 친구에게 편지를 썼어요.

 

암흑 같은 망상이 찾아왔을 때는

이미 청춘의 무더운

여름이었어요.

 

봄이 가고 여름이 온 것이지요.

 

강과 나무는 춤을 추었지만

새들은 하늘을 건너 다녔지만

내겐,

항아리처럼 작은

내 인생이 있었어요.

     

 

6.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하고,

한참 멈춰 있습니다.

 

달과 별이 내 곁을 흐르던 날들이

내겐 있었습니다.

산과 강이 내 그림자 되어 비치던 날들이

내겐 있었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했습니다.

 

또 편지 올리겠습니다.

     

 

8. 떨어지는 이슬에

 

떨어지는 이슬에

맺혀 있는 말들,

 

사랑합니다,

아름답게 살고 싶습니다,

가을이 저 멀리에 있어서

가까이 들리지 않는 그대의 말들을

 

새여,

노래하는 이여,

나는 한 방울의 이슬이었습니다.

밤이었습니다.

     

 

9. 기도하면서


기도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먼 그리움을

고백할 수 있을까요.

 

내가 갖고 싶은 건

듣고 싶은 건

한 줄의 시,

바람에 쓸리며 붙어 있는

푸르른 날을 기억하는

잎사귀의 언어,

 

내 몸에 가까이 붙어 있어서

떨치고 싶던 욕망들

햇볕을 받던 욕망들을 뒤로 하고

 

기도하면서

시를 써요.

     

 

12. 내 딸은 멀리 가 있어요


내 딸은 멀리 가 있어요.

 

강과 바닷물을 건너

겨울 저편에 가 있어요.

 

그곳엔 낮과 밤이,

역사와 사건이

들리지 않는 곳이에요.

 

새들이 날아들어

아침을 전하는 언덕,

꽃잎이 피면

꽃잎 하나 먹고

숨을 익히는 곳에

 

내 딸은 가 있어요.

     

 

19. 사랑의 속살을 찾듯


사랑의 속살을 찾듯

산을 더듬듯

걸어 올라가 봅니다.

 

산이여,

오를수록 높기만한

시의 숲이여,

말들의 잎새여,

가느다란 흔들림이여.

 

사랑의 속살을 찾듯

가만히 읽는

나여.

   

 

 

25. 나 여기 서 있겠어요


나 여기 서 있겠어요.

꽃 피는

꽃나무처럼요.

 

눈비 그친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 비치던

,

 

서러운 생애(生涯) 한쪽에

망울지던

,

 

나 여기 오래도록 서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