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온종일 내리더니,
오늘도 쉬지 않고 가을비가 내린다.
여름내 목말랐던 대지를 충분히 적셨으니
이제 그만 내려도 좋겠는데,
이왕 시작한 거 내릴 만큼 내리고 말겠다는
나이 불어가는 친구의 쓸데없는 고집 같은 비다.
내일은 오름 강좌 열두 번째로
제주 세계자연유산 거문오름 답사인데
다른 오름과 달리 비가 오면 영 불편한 곳이어서
오늘 중으로 그쳤으면 좋으련만.
쓸 원고도 밀렸는데,
그저께 가족묘지 축담 공사 가서
찍은 사진 중에 둥근잎유홍초를 골라 놓고
시집 모아놓은 곳을 쳐다보는데, 문득
‘저, 빗소리에’가 눈에 띈다.
가을 향기 나는 시 몇 편을 골라
둥근잎유홍초와 같이 올린다.
♧ 저, 빗소리에
만약,
꽃이 한 번 피고 영영 질 줄 모른다면
그때도 아름답게 보일까
길가나 로터리에 잘 가꾸어 놓은 꽃도
때론,
제복을 입은 마네킹 같이
성형 가면을 쓴 웃음이
낯설 때도 있는데
오늘따라
오름 어느 자락에 없는 듯 피어 있던
작은 들꽃 한 송이
자꾸 눈에 아른거린다
다듬지 않아서
쉽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서
더 그립고 애틋한
가슴을 두드리는
저, 빗소리에
어딘가에서는 꽃 한 송이 피어나고
어깨를 들썩이는 울음 같은
저, 빗소리에
어딘가에서는 꽃 한 송이 지고 있겠지
꽃은 질 때 더 아름다워야 하리
황홀한 사랑도 저물 때가 있듯이
누군가의 가슴에
더 애틋한 그리움으로
고여 오듯이
♧ 감물 들이며
머뭇거리는 여름에
작대기를 하나 세워 놓고
지나간 세월을 갈아
주물럭
주물럭
녹색감물에 노을을 풀어
활활 타오르는
단풍빛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꿈꾸고 싶어라
♧ 열아흐레 달
우표 없는 사연들 달무리지어
뒷목이 뻐근하게 올려다보면
풍선에 공기가 새어나가듯
웃음이 빠져나가고 있는
둥근 밥상
조개송편 만들던 어머니의 손
산적을 만들던 아버지의 마른 기침소리
아파트 남쪽 베란다에 걸려
남몰래 조금씩 야위어가는 시간
길 잃은 귀뚜라미 소리에
점점 시름이 깊어지는
열아흐레 달
♧ 바다 손금
연휴로
뒹글뒹글 게으름 피우다가
방파제로 나갔다
하늘도 나처럼 세수를 안했는지
꾀죄죄하기에
바다는 어떨까 고개 숙이는데
온몸에 닭살 돋았다
검푸른 산맥이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는
실핏줄 같은 등고선이 섬세하게 드러난 대동여지도
하,
경이로운 바다의 손금
나도 모르게 내 손을 펴 보았다
그동안 손등에 가려 자세히 보지 못했던
거미줄같이 복잡한 지하철 노선 같은
육십 평생의 삶을 대변해 주듯
거기엔
수많은 잔뿌리들이 가지를 치며
자라고 있었다
물의 파장 같은 삶의 파장이
♧ 수선집
그는 칠성통 번화가 일류 의상실 디자이너였다
그 의상실은 은행만큼이나 문턱이 높았다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고급’이란 계급을 갖고 있었다
보통여자들이 한 번쯤 들어가 보고 싶고
한 벌쯤 입고 싶어 하던 맞춤복 집이었다
지금은 시대에 밀려 뒷걸음질 치듯
후미진 뒷골목으로 밀려나
간판도 없는 유리창에
‘고급 의상이나 밍크코트를 고쳐 드립니다.’라고 써놓고
수선집을 하고 있다
그는 아직도 마지막 자존심
‘고급’이란 뿔을 머리에 달고 있다
♧ 광명사
여고시절부터 골목길 환하게 비추던 집
초가지붕이 슬레이트로, 슬래브로 바뀌어가도
세탁소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져도
간판 이름은 그냥 그대로 남아 광명사
키가 큰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집에서는 아무리 다림질하여도
펴지지 않는 주름
스팀으로 팍팍 펴주는 집
구겨지고 더러워진 양심도
가출한 엄마보다 알코올중독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빠를 더 그리워하는
다정이의 얼룩지고 상처받은 마음도
스팀 한 방으로 펼 수만 있다면
요술램프 같은 낡은 재봉틀로
조각난 마음을 꿰매고
구겨진 마음도 다려줄 것 같은 집
이름 그대로
내 생애 반짝, 빛을 찾아 줄 것만 같은
그 집
*김순선 시집 '저, 빗소리에'(심지시선 024, 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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