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진하 시집 '산정의 나무'

김창집 2016. 9. 29. 23:59



흔들림 - 진하

 

바람이 없어도 문득 흔들리는 가지들이 있다.

좌우로 마주 보며 돋아난 푸른 잎사귀들

한낮 무거운 해의 화살에 맞아

중심을 잃고는 한동안 비틀비틀

모든 목숨이 가까스로 지키는 이 오묘한

균형의 원리를 이제야 깨닫는다는 듯

낮술 한 잔 마시지 않은 몸에 어질머리

텅 빈 공간 속으로 그림자 흩뿌리며 비칠비칠

불완전한 비대칭의 이 푸른 세상 속

멀쩡한 걸음걸이도 가끔씩 헛발질이다.

   

 

 

백로 무렵

 

오지 않는 가을

가지 못하는 여름

시든 고추 줄기 위에서

떠날까 말까 망설이는

날개가 투명한 잠자리 한 마리

깜빡 감기는 둥그런 눈알 속에

하늘이 한 바퀴 빙글 돈다.

 

아직 시퍼런 풋감들

철없이 빈둥거리는 시절

등짝을 후려치듯 달려드는 햇살을

손바닥 활짝 펴서 둥글게 빚으며

토란 이파리를 견디고 있다.

이제나 저제나 하는 기다림 속에서

열매들은 붉게 안으로 익는다.

   

 

 

가을 편지

 

잘 지내고 있나요.

이방의 가을도 이곳처럼 스산한지,

소식 오간 지 오래군요.

어차피 갈 거라면

미련 없이 가겠다는 듯

가지 끝 마지막 이파리마저

모질게 훑어버리고

거리 끝으로 달려가는 바람의

황망한 뒷모습을 보고 있소.

계절의 비명처럼

손사래 치는 단풍잎을 밟으며

나는 그대가 사는 하늘 쪽

산마루의 석양을 바라보고 있소.

   

 

 

낙법

 

가지 끝에서 마지막까지 꼿꼿이

하늘을 찌르는 자세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파리 하나

밤새 시린 땅에 떨어져 있다.

세상을 뜰 때는 가볍게

구차한 몸부림 들키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캄캄한 밤에

어딘가로 흘러가 버리고 싶다.

울울창창히 푸른 빛 뽐내던 여름날

끝내 저 이파리의 낙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허섭스런 거름으로 썩기도 어려우리.

    

 

 

가시나무

 

가시나무는 외롭다.

여럿이 있어도 외롭다.

새순 끝에도 작은 가시가 돋는다.

그것이 가시나무의 운명이다.

 

상처 같은 꽃이 피었다 지고

새들은 포물선을 그리며 피해간다.

나는 가끔 나무가 우는 가녀린 소리를 들었다.

아직 나는 가시나무의 앞모습을 본 적이 없다.

 

바람이 크게 불고 난 다음 날

나무의 등이 홀로 조금 굽어 보였다.

빨간 열매가 몇 방울

오래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겠다.

     

 

참나무보살


참나무보살님 다시 가을이네요.

도토리 열매들 다 익었겠네요.

숲길 헤매는 너구리들 길 잃지 말게 하시고

초로초롱한 눈이 귀여운 다람쥐 식구들

알뜰살뜰 겨울나게 해 주세요.

가볍게 말린 이파리들 두툼히 깔아

눈이 내려와도 차갑지 않게 하시고

산길 가는 나그네들 발 안 아프게

푹신푹신한 길 만들어 주세요.

외로운 장수풍뎅이 쉴 자리

껍데기 깊은 속에 만들어 주시고

길 없는 암자의 노승 하늘로 가는 길

마른 장작과 함께 타올라

쓸쓸하지 않게 해주세요.

나무관세음참나무보살님.


      *진하 시집 '산정의 나무' (문학의 전당, 마음의 詩 28. 2009.)

                  사진 : 요즘 한창 피고 있는 이고들빼기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