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영미 시집 '물들다'

김창집 2016. 10. 19. 00:36


시인의 말


참으로 오소소한 날이다

사는 동안의 얼룩으로

더러는 어지럽고 더러는 무뎌진 채

나의 한부분이 된 무늬들을 꺼내어

업으로 각인 된 것들을 껴입는다.

삶을 한참 건너왔는데도

아직도 알 듯 말 듯 한 것이

오히려 눈만 끔벅거리는 시간들이

더 많아졌다.

가도 가도 다 가지 못할 것 같은

불안으로 지새는 날들이 먼지처럼 쌓여간다.

죽을 것 같은 날들이 있었음에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그리워해야 할

대상이 없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내 생애 가장 큰 죄였음을

이제와 알게 되었다.

다시 옷깃을 여미는 시간이다.


  -찬비 오는 첫날에

                  김영미    


   

경고

 

김규동 선생의 경고란 시를 필사하다가

나도 경고를 받는다

 

펜을 잡은 손이 가늘게 떨리고

글씨는 삐뚤빼뚤

펜 끝이 파르르 성을 낸다

 

비우지 못한 마음속에

깊이 잠겨있던 이기심이

나를 밟고 일어선다

 

불가뭄이 들어 메마른 가슴

생각할 줄 모르는 영혼

하나를 향한 거침없는 집착

 

버려야 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와

깊은 수렁이 되어 발목을 잡는다

 

펜을 놓고

멍하니 필사하던 종이를 바라본다

늦은 하루가 송곳이 되어

가슴을 겨눈다

 

    

 

귀가 가렵다

 

바람이 길을 내려는지

바람 부는 날엔 귀가 더욱 가렵다

 

묵은 침묵을 깨고 달팽이관이 움직인다

고막 속에서 맴도는

모르스부호의 타전, 게슈타포의 걸음, 심장이 떨리는 소리

바람을 타고 오는 고주파의 변형엔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너무 많다

 

경직과 전율 사이를 옮겨 다니는

나의 위기와 의지 사이에서

까닭 없이 흔들거리는 가벼운 중심은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생활과 격리된 적분과 미적분을 나누는 통계는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이야기였고

오래된 관습으로 마모되어 설레지 않는 감각 중에

 

여전히 뜨거움으로 해독할 수 없었던 난제는

세상을 향한 뜬금없는 두근거림

 

돌아눕지 못하는 한밤의 신들린 고통

나와 다른 것들에 관한 두려움의 보고서

마찰이 마찰과 부대끼는 소리

상처의 이름 뒤에 붙은 단절에 대한 수많은 견해

맞물리지 못하는 생각들의 부정교합

듣고 싶지 않았던 말들의 반란

 

귀가 가렵다, 바람의 귀가 아프다

 

달라서 낯설었던 너의 이야기가

귓속을 후벼 파는 밤엔 깨질 것 같은

줄탁에 관한 설레임의 보고서를 쓴다

    

 

 

가을의 직설화법

 

사랑했던 마음을

다 모아

끝내는 천지를

모두 태워버린

붉은 발화의 정점

지난 시절이

진정 푸를 수 있었던 것은

너를 향한 그리움

변하지 않았던

사랑 때문이었다

 

    

 

나의 가을

 

네가 나에게 온 지금

우리의 시간은 가장 빛났다

 

많은 날들 중에

오직 너를 사랑할 수 있는

기억들로 계절은 깊어가고

 

너는

 

벽에 기댄 가을 긴 그림자처럼

숨죽인 채 떨고 있었고

 

돌부리에 채어 넘어지는 아이처럼

자꾸만 말을 더듬었고

 

목이 매어오는 울음을 삼키듯

가슴을 안타까이 어루만졌다

 

수줍은 너의 말이 머뭇머뭇

내 앞에 다가와 섰을 때

 

너는

 

흙 속을 파고드는 나무뿌리처럼

떨림으로 젖어가는

내 눈빛을 따라

가슴 속에 난 길을 걸어왔다

 

사랑이라는

몇 개절 빛바랜 역을 지나쳐온

아주 맑은 가을 하늘

 

    

 

새벽에 고기국수를 만들어서

 

새벽1, 독서실에서 돌아 온

아들의 허한 배를 달래기 위해 국수를 삶았다

고기국수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하는 아이

아이는 국수를 내놓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고개를 숙인다, 말없이 먹먹하게 국수그릇 속으로

시험문제의 답처럼 빠져드는 눈물방울

기말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세상을 살아보니 이렇다하게 대답할 해답은 없었는데

차마 해답은 없고 해답을 만들어가는

요령만 있더라 말하지는 못하겠고

아이의 너울지는 어깨를 가만히 다독였다

 

돼지의 뼈와 살을 푹 삶고 삶아 고아낸

뽀얀 국수국물처럼

제 가슴 고아가며 사는 게

세상의 일이다. 라는 말을

목울대 뒤로 꾹 눌러 삼키곤

나오지도 않는 빈 가슴 내밀어

젖 물리듯이

아이 앞으로 국수그릇만 자꾸 밀어 넣었다

 

시험이 아니었다면 꿀맛 같았을 음식을

아이는 제 마음 보여주듯

젓가락으로 휘젓기만 하고 있다

뽀얀 국물 속에서 국숫발은 퉁퉁 불어가고

벙어리가 되어버린 입 대신

한숨을 꾹 눌러 삭힌 가슴이 말을 한다

어서 먹어봐, 이놈아.

        

 

물들다

 

햇빛이 나무를 품어 나무는 한쪽이 환해졌다


나무는 그늘을 품어 그늘 한쪽이 서늘해졌다


그늘은 나를 품어 나의 몸엔 그들의 문신이 새겨졌다


나는 의자에 나를 새겨 의자가 내 모습으로 얼룩졌다


제 몸을 다 내주며 기울어져가다


이윽고 자신을 다 지우고 하나가 되어


낮은 곳을 흥건히 적셔가는 부드러운 동질감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너의 모든 것을 품어가는 일


하나가 하나에 기대어 천천히 물들어가는 오후


오후는 아침을 아침은 어제 저녁을


말없이 고요히 다 받아들이고


하루가 되는 것이다



* 김영미 시집 '물들다'(리토피아포에지 51, 2016.)에서

   사진 : 요즘 높은 지대 오름에서 한창 물들어가는 팥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