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도종환 시인의 홈페이지
‘구구산방 도종환 시인의 집’에 들렀다.
‘새로 쓴 시’ 방에 들어가 보니
2014년 9월 24일에 마지막으로 올린
아래 시 네 편이 최신 작품이다.
의원 배지를 단 이후,
가끔씩 TV 화면에 스치는 모습을 보며
택한 길을 열심이 걷고 있는 걸 확인하곤 한다.
부디 마음먹은 일 잘 하고 돌아와
찬찬히 새로 쓴 시 읽고 싶다.
건투를 빌며
요즘 추운 날씨 속에서도 새로 붉게 피는
동백꽃과 함께 올린다.
♧ 광화문 광장에서
고통은 끝나지 않았는데 여름은 가고 있다
아픔은 아직도 살 위에 촛불심지처럼 타는데
꽃은 보이지 않는지 오래되었다
사십육일만에 단식을 접으며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가
미음 한 숟갈을 뜨는데
미음보다 맑은 눈물 한 방울이 고이더라고
간장빛으로 졸아든 얼굴 푸스스한 목청으로 말하는데
한 숟갈의 처절함
한 숟갈의 절박함 앞에서
할 말을 잃고 서 있는데
한 숟갈의 눈물겨움을 조롱하고 야유하고 음해하는
이 비정한 세상에 희망은 있는 것일까
스스로를 벼랑으로 몰아세운 고독한 싸움의 끝에서
그가 숟갈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때
미음보다 묽은 눈물 한 방울이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이 나라가 아직도 희망이 있는 나라일까 묻는데
한없이 부끄러워지면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생을 내팽개치고 싶어지면서
넉 달을 못 넘기는 우리의 연민
빠르게 증발해 버린 우리의 눈물
우리의 가벼움을 생각한다
그 많던 반성들은 어디로 갔는가
가슴을 때리던 그 많은 파도소리
그 많은 진단과 분석
나라를 개조하자던 다짐들은 어디로 가고
자식 잃은 이 몇이서 십자가를 지고 이천 리를 걷게 하는가
팽목항으로 달려가던 그 많은 발길들은 어디로 흩어지고
증오와 불신과 비어들만 거리마다 넘치는가
맘몬의 신을 섬기다 아이들을 죽인 우매함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목소리
사월 십육일 이전의 세상으로 다시
물길을 돌리려는 자들의 계산된 몸짓만 난무하는가
이런 어이없는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는 나라를
만들자는 게 과도한 요구일까
내가 이렇게 통곡해야 하는 이유를 밝혀달라는 것이
슬픔의 진상을 규명하고
분노의 원인을 찾아달라는 것이
그렇게 무리한 요구일까
나라는 반동강이 나고
희망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미안하고 미안하여 고개를 들 수 없는데
어젯밤엔 광화문 돌바닥에 누워 어지러운 한뎃잠을 자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땅을 굽어보며
다시 초췌한 눈동자로 확인한다
여기는 수도 서울의 한복판이 아니라
고통의 한복판이라고
이곳은 아직도 더 걸어올라가야 할 슬픔의 계단이라고
성찰과 회한과 약속의 광장이라고
아직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고
이렇게 모여 몸부림치는 동안만 희망이라고
꺼질듯 꺼질듯 여기서 몸을 태우는 동안만 희망이라고
정갈한 눈물 아니면 희망은 없다고
정직한 분노 아니면 희망은 없다고
♧ 정경
-할슈타트에서
아름다운 정경은 사람을 선하게 한다
풍경의 전신을 대하는 순간
짧은 탄성이 저절로 새어 나오지 않으면
아름다움이 아니다
탄성이 물무늬처럼 미소로 바뀌어 번져나가고
마음은 천천히 선한 빛깔로 물들게 된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을 때도 그렇다
예쁜 어린아이를 만났을 때도 그렇다
사막 위에 별들이 하얗게 떴을 때도 그러하다
설산 기슭 순백의 눈을 볼 때도 그러하다
마음을 선하게 하는 초저녁 성당의
성가야말로 좋은 노래다
천천히 눈가에 눈물이 맺히게 하는
오래된 영화 그런 영화가 좋은 영화다
할슈타트 호수에 저녁빛이 내리고 있다
그대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 그러하다
♧ 나머지 날
고립에서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이층집을 짓고 살았으면 좋겠네
봄이면 조팝꽃 제비꽃 자목련이 피고
겨울에 뒷산에 눈이 내리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네
고니가 떠다니는 호수는 바라지 않지만
여울에 지붕 그림자가 비치는 곳이면 좋겠네
아침 기도가 끝나면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리고
못다 읽은 책을 읽으면 좋겠네
파도처럼 밀려오는 소음의 물결에서 벗어나
적막이 들판처럼 펼쳐진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네
자작나무들과 이야기하고
민들레꽃과도 말이 통하면 좋겠네
다람쥐 고라니처럼 말을 많이 하지 않고도
평화롭게 하루를 살았으면 좋겠네
낮에는 씨감자를 심거나 남새밭을 일구고
남은 시간에 코스모스 모종과 구근을 심겠네
고요에서 한 계단 낮은 곳으로 내려가
단풍드는 잎들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살면 좋겠네
나무들이 바람에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곳에서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이들과 어울려 지내면 좋겠네
울타리 밑에 구절초 피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굽은 길이면 좋겠네
추녀 밑에서 울리는 먼 풍경소리 들으며
천천히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네
짐을 조금 내려놓고 살았으면 좋겠네
밤에는 등불 옆에서 시를 쓰고
그대가 그 등불 옆에 있으면 좋겠네
하현달이 그믐달이 되어도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듯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 묻지 않으며
내 인생의 가을과 겨울이 나를 천천히 지나가는 동안
벽난로의 연기가 굴뚝으로 사라지는 밤하늘과
나뭇가지 사이에 뜬 별을 오래 바라보겠네
♧ 별을 향한 변명
별들이 우리를 보며 눈빛을 반짝이는 거라고 믿었다
밤마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꿈꾸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은 모두 선한 씨앗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사랑이 손짓해 부르면 그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고
물불 안 가리고 사랑의 강물에 뛰어들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라 믿으며 눈물로 기도했고
이길 수 없는 것들에게 싸움을 걸었다
판판이 깨지고 나서도 지지 않았다고 우겼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데도 희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인이 아름다운 꿈을 꾸지 않으면
누가 꿈을 꾸겠느냐고 시를 썼고
견딜 수 없는 걸 견디면서도
사람들에게 포기하지 말자고 편지를 보냈다
이 길을 꼭 가야 하는 걸까 물어야 할 때
이 잔이 내가 받아야 할 잔인지 아닌지를 물었다
우리가 꾼 꿈이 이루어지는 것인지 별에게 묻고
별이 대답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꿈꾸고 사랑하고 길을 떠나자고 속삭였다
그것들이 내 불행한 운명이 되어가는 걸
별들이 밤마다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서시」마지막 행
--‘구구산방 도종환 시인의 집’(http://www.djhpoem.co.kr/) ‘새로쓴 시’에서
'아름다운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경업의 '겨울산' 시편 (0) | 2017.01.11 |
---|---|
가족소리판 굿 '애기좀녀의 꿈' (0) | 2016.12.05 |
홍해리 시인의 '할喝'외 2편과 애기동백 (0) | 2016.11.25 |
박명자 시인의 나무시편 (0) | 2016.11.23 |
권경업의 가을 시편 (0) | 2016.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