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흰눈이 내리는 것은
가끔은, 칙칙한 땅 위에서
온몸으로 질척이고 싶은 것이다
왜냐고, 왜 그러냐고 묻지 마라
하얀 가운데, 더 하얗게 지키려 하다 보면
때로는 중압감에, 술 처먹고
한번쯤 꼭지가 돌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이다
△ 산사람
꿈을 꾸어도, 늘
천상(天上)의 꿈만 꾸는
품어도, 늘
제 오르는 산보다 더 높은 것을 품는
피가 푸른 사람들
산정(山頂)으로 돌아가는 옆길을 두고
벽(壁)으로 벽으로만 오르는
고행(苦行)의 길[道]
천화대 범봉 끝, 알프스 마(魔)의 벽
히말라야 설산(雪山) 마루
너의 영혼의 짙푸른 하늘, 그 무한
무소유의 자유가 오름의 절대 이유인
그대들은 구도승(求道僧)
△ 우리는 전생에 열목어(熱目魚)였나 보다
삶에 어찌 제 속내를 다 드러내며 살까
앞앞이 못한 이야기 풍편에 떠도는
바람의 여울목 쑥밭재에 서면 눈물이 납니다
신밭골 약초 캐던 외팔이 하씨도
늘 젖어 시린 가슴, 어쩌다 해거름에
남몰래 꺼내 말리다 보면
설운 마음에도 노을은 뜨거워 눈물은 났으리라
세상을 뜨겁게 바라보는 이
보이는 모든 것이 뜨거운 이
그리하여 뜨거워진 눈을 찬 눈물로 식혀야 한다면
전생에 그대도, 아마
차고 맑은 물에 눈을 식히던 열목어였나 보다
유정(有情)한 시인아! 생명주처럼 풀린 강물
흔들리는 청솔가지에도 눈물이 나고
저무는 멧부리에 걸린 조각구름에도 눈물이 납니다
아! 우리는 전생에 열목어였나 보다
△ 겨울산
모진 진눈개비, 비바람
온몸으로 막아내다가 꼬부라진
중봉 비탈 옹이 투성이 늙은 소나무는
누군가의 아버지입니다
쉬운 건 없다, 동서남북 어디에도
망개 넝쿨 같은 세상, 어서 헤쳐가라며
살 저미고 뼈 깎아 오솔길 내어준 당신은
누군가의 어머니입니다
엄동의 한가운데
힘겨워하면서도 좌절하지 않던
누군가의 불쌍한 남편이고 누군가의
핏기 잃은 안쓰러운 아내였습니다
참으로, 참으로 사랑하지만
한 번도 사랑한다 불러보지 못한
그 흔한 사랑한다는 말이
왜, 당신에게만 그렇게 쑥스러웠는지
우리 걸어가는 이 땅의 모든 길은
당신으로부터 시작됐고
가장 가까이 하늘에 다다른
모든 길의 끝에 당신이 있습니다
제법 키웠다 싶자 훌쩍 달아나버리는
품안의 철없던, 그 작은
것들을 위해 아낌없이 바친 청춘
바스락 바스러질 몸매에
밤새워, 떠나보낸 것들 마음이 쓰여
가랑가랑 앓는 목의 갈참나무 마른 가랑잎들
가지런히 쪽찔 틈도 없이
어느새, 상고대 피어 허옇게 세어버린 머릿결
가진 것 다 내주어 앙상히 겨울을 맞는
당신이 거기에 계십니다
---
*중봉 - 지리산 천왕봉 북쪽 연봉
*상고대 - 나무나 풀에 눈꽃처럼 핀 서리
△ 백두대간 겨울바람이 거친 것은
그 순하던 솔바람들
동면(冬眠)에 들지 못해서네
숫눈 아래 은폐(隱蔽)된
교활한 아귀(餓鬼)의 아가리, 올가미 벼락틀
여리고 착한 목숨 겨냥한 비겁한 자의 총구
비겁하게 버리고 간 쓰레기
쓰레기 같은 놈들에 의해
난자당한 시산(屍山)의 상처 위
어디 몸 누일 곳이 있어야 말이지
* 권경업의 지리산 시편
‘뜨거운 것은 다 바람이 되었다’(작가마을, 2012)에서
* 사진 - 한라산 사라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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