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권경업의 '겨울산' 시편

김창집 2017. 1. 11. 09:04


흰눈이 내리는 것은

 

가끔은, 칙칙한 땅 위에서

온몸으로 질척이고 싶은 것이다

 

왜냐고, 왜 그러냐고 묻지 마라

 

하얀 가운데, 더 하얗게 지키려 하다 보면

때로는 중압감에, 술 처먹고

한번쯤 꼭지가 돌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이다

     

 

 

산사람

 

꿈을 꾸어도,

천상(天上)의 꿈만 꾸는

품어도,

제 오르는 산보다 더 높은 것을 품는

피가 푸른 사람들

 

산정(山頂)으로 돌아가는 옆길을 두고

()으로 벽으로만 오르는

고행(苦行)의 길[]

 

천화대 범봉 끝, 알프스 마()의 벽

히말라야 설산(雪山) 마루

너의 영혼의 짙푸른 하늘, 그 무한

무소유의 자유가 오름의 절대 이유인

그대들은 구도승(求道僧)

     

 

 

우리는 전생에 열목어(熱目魚)였나 보다

 

삶에 어찌 제 속내를 다 드러내며 살까

앞앞이 못한 이야기 풍편에 떠도는

바람의 여울목 쑥밭재에 서면 눈물이 납니다

신밭골 약초 캐던 외팔이 하씨도

늘 젖어 시린 가슴, 어쩌다 해거름에

남몰래 꺼내 말리다 보면

설운 마음에도 노을은 뜨거워 눈물은 났으리라

 

세상을 뜨겁게 바라보는 이

보이는 모든 것이 뜨거운 이

그리하여 뜨거워진 눈을 찬 눈물로 식혀야 한다면

전생에 그대도, 아마

차고 맑은 물에 눈을 식히던 열목어였나 보다

유정(有情)한 시인아! 생명주처럼 풀린 강물

흔들리는 청솔가지에도 눈물이 나고

저무는 멧부리에 걸린 조각구름에도 눈물이 납니다

 

! 우리는 전생에 열목어였나 보다

     

 

겨울산

 

모진 진눈개비, 비바람

온몸으로 막아내다가 꼬부라진

중봉 비탈 옹이 투성이 늙은 소나무는

누군가의 아버지입니다

쉬운 건 없다, 동서남북 어디에도

망개 넝쿨 같은 세상, 어서 헤쳐가라며

살 저미고 뼈 깎아 오솔길 내어준 당신은

누군가의 어머니입니다

엄동의 한가운데

힘겨워하면서도 좌절하지 않던

누군가의 불쌍한 남편이고 누군가의

핏기 잃은 안쓰러운 아내였습니다

참으로, 참으로 사랑하지만

한 번도 사랑한다 불러보지 못한

그 흔한 사랑한다는 말이

, 당신에게만 그렇게 쑥스러웠는지

우리 걸어가는 이 땅의 모든 길은

당신으로부터 시작됐고

가장 가까이 하늘에 다다른

모든 길의 끝에 당신이 있습니다

제법 키웠다 싶자 훌쩍 달아나버리는

품안의 철없던, 그 작은

것들을 위해 아낌없이 바친 청춘

바스락 바스러질 몸매에

밤새워, 떠나보낸 것들 마음이 쓰여

가랑가랑 앓는 목의 갈참나무 마른 가랑잎들

가지런히 쪽찔 틈도 없이

어느새, 상고대 피어 허옇게 세어버린 머릿결

가진 것 다 내주어 앙상히 겨울을 맞는

당신이 거기에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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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 - 지리산 천왕봉 북쪽 연봉

*상고대 - 나무나 풀에 눈꽃처럼 핀 서리

     

 

백두대간 겨울바람이 거친 것은

 

그 순하던 솔바람들

동면(冬眠)에 들지 못해서네

숫눈 아래 은폐(隱蔽)

교활한 아귀(餓鬼)의 아가리, 올가미 벼락틀

여리고 착한 목숨 겨냥한 비겁한 자의 총구

비겁하게 버리고 간 쓰레기

쓰레기 같은 놈들에 의해

난자당한 시산(屍山)의 상처 위

어디 몸 누일 곳이 있어야 말이지

 

 

* 권경업의 지리산 시편

             ‘뜨거운 것은 다 바람이 되었다’(작가마을, 2012)에서

* 사진 - 한라산 사라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