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후목 소상호 시집 '태양의 첩자'에서

김창집 2016. 12. 21. 16:28


두 할머니

 

종로 3가역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던 한 노파가

발을 뻗었다 오므렸다 한다.

마치 건너지 못할 강을 만난 듯.

먼 옛날 뜬눈으로 지샌 자식의 홍역이라도 치르는 듯

좀처럼 요지부동이다.

출근에 늦은 미혼의 아가씨들,

중년의 명퇴를 앞둔 남자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그 앞에서 동구 밖 넘겨다보듯 멈춰선 노파,

그랬었을 게다 내 어머니도

나를 도시 저쪽으로 보낼 때마다

동구 밖 어느 쯤에 서서 지금의 저 할머니처럼

함께 건너지 못한 세월을 상상이라도 하듯

그렇게 한참이고 서성거렸을 게다.

동구 밖 어머니와 겹쳐진 모습에

강한 온기를 들이지 못한 서걱거린 마음이

가을 저쪽에서 오는 차가운 발걸음소리에

부끄러운 질책의 외침으로 들린다.

        

 

 

세월의 소리

 

그냥 잘 지내라는 세월의 소리

그냥, 그렇게 잘 잊혀지라는 세월의 덕담

아니 그냥 너의 이름 속에서 서성이다

너의 미래 속으로 가라는 세월의 조언

그러나 나에겐 그 소리들을 담아낼 세월의 힘이 약하다.

아니 없다.

가을의 모과나무 밑에서 은밀히 향기를 익히고 있는

열매의 시간들을 기다릴 수 없고

아직 오지 않은 고등학교 때의 한 소녀를

어스름한 골목에서 기다릴 용기도 없다.

없는 것 투성이, 내 안의 가난한 나

나에겐 여전히 세월의 그림을 받아낼 내 안의 세월들이 적다.

따라서 세월의 그림을 그리다 지쳤있다

   


초상화

 

누군가는 인생 속에서 철학 하나 익힌다지만

나는 무엇을 꿈꾸며 살아 왔을까?

그리고 그에겐 늙은 빵처럼 뜯어먹을

하루치의 상념도 있었던 걸까?

언제나 나의 질문들은 익명의 그에게

가 닿지 못한 채 돌아오지 못하기 일쑤다.

 

철학이라는 것 혹은 스스로 기억할 수 없는 세월의 한쪽에서

초상화처럼 늙고 있다는 것

어쩌면 이런 것으로부터 나는 사막 위를 걷고 있는

낙타일지도 모를 일.

세상에 어떤 사막이 풀도 없는 계절 속에서

길 잃은 철학 하나 구해 내겠는가.

나에겐 세월에 버림받은 철학 몇이 더 있다.

    

 


굴뚝의 은유

 

굴뚝은 하루치의 은유를 저녁의 허공에게 띄우는

회색 계통의 서신이다.

지상의 축축한 오후들의 추신이며

수신자 부담의 붉은 소임이다.

그러나 노을이 찍히지 않은 세상의 저녁은 적다.

굴뚝은 사랑할 게 많은 집들이

저녁노을에 건너와

가슴마다 그리움을 피워 올리는

낮은 온기의 메시지이다.

 

그리고 나는 그 집에 오래도록 머문 적이 없는

불 때지 않은 외간 남자의 손님이다

      

  

 

파랑 꿈

 

오래전 나에겐 열망의 날들이 있었다

봉선화 핀 언덕 꽃씨의 무게로

떠다닐 수 있는 계절 속의 바람들.

그것들이 내 가슴을 훔치듯

낮게 밀려올 때가 있었다.

 

이국의 경치까지 가져오고 싶었던 시절

그러나 꿈들은 거칠은 바람이 이르면

소멸되고 마는 모래산과 같은 것인가

봉숭아 핀 언덕을 재개발 시절의 중턱에서 분실했고

꽃씨의 무게만큼 떠다니던 바람도 종적을 감춘 지금.

하지만 나에겐 아직 남아있는 최후의 꿈들이 있다

더 먼 옛날에 날린 것일수록

더 큰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삶의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어떤 의미.

오후가 되면 나의 식사를 챙겨주는

아내의 짧은 통화와 내 젊음이

이룩하지 못한 꿈들을 변호중인

어느 조그마한 그림처럼

나는 그 꿈을 너무나도 좋아했다

        

 

난초

 

고통을 행복 곁에 메워 둔다.

 

난초는 겨울을 넘어와야 제 향기에 눈을 뜬다.

향기를 맡을 줄 아는 시간은 얼마나 따뜻한가.

그러나 고통을 행복 곁에

메워 두는 일은 더욱 고독하다.

사막에서 바늘하나 찾는 일처럼 외롭다.

 

그렇다면 고통을 행복 곁에 메워 두는 일은 반드시

기적 같은 일일까

제 향기에 탈진한 난초를 올려놓고서

그 꽃을 꺾어 둔다.

그래서 추운 행복을 주는

난초 한 그루에 미치도록 묶어두는 것

바로 이것이 내가 난초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 후목 소상호 시집 '태양의 첩자'(히람미디어, 2016)에서

                                                                                  사진 : 남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