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할머니
종로 3가역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던 한 노파가
발을 뻗었다 오므렸다 한다.
마치 건너지 못할 강을 만난 듯.
먼 옛날 뜬눈으로 지샌 자식의 홍역이라도 치르는 듯
좀처럼 요지부동이다.
출근에 늦은 미혼의 아가씨들,
중년의 명퇴를 앞둔 남자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그 앞에서 동구 밖 넘겨다보듯 멈춰선 노파,
그랬었을 게다 내 어머니도
나를 도시 저쪽으로 보낼 때마다
동구 밖 어느 쯤에 서서 지금의 저 할머니처럼
함께 건너지 못한 세월을 상상이라도 하듯
그렇게 한참이고 서성거렸을 게다.
동구 밖 어머니와 겹쳐진 모습에
강한 온기를 들이지 못한 서걱거린 마음이
가을 저쪽에서 오는 차가운 발걸음소리에
부끄러운 질책의 외침으로 들린다.
♧ 세월의 소리
그냥 잘 지내라는 세월의 소리
그냥, 그렇게 잘 잊혀지라는 세월의 덕담
아니 그냥 너의 이름 속에서 서성이다
너의 미래 속으로 가라는 세월의 조언
그러나 나에겐 그 소리들을 담아낼 세월의 힘이 약하다.
아니 없다.
가을의 모과나무 밑에서 은밀히 향기를 익히고 있는
열매의 시간들을 기다릴 수 없고
아직 오지 않은 고등학교 때의 한 소녀를
어스름한 골목에서 기다릴 용기도 없다.
없는 것 투성이, 내 안의 가난한 나
나에겐 여전히 세월의 그림을 받아낼 내 안의 세월들이 적다.
따라서 세월의 그림을 그리다 지쳤있다
♧ 초상화
누군가는 인생 속에서 철학 하나 익힌다지만
나는 무엇을 꿈꾸며 살아 왔을까?
그리고 그에겐 늙은 빵처럼 뜯어먹을
하루치의 상념도 있었던 걸까?
언제나 나의 질문들은 익명의 그에게
가 닿지 못한 채 돌아오지 못하기 일쑤다.
철학이라는 것 혹은 스스로 기억할 수 없는 세월의 한쪽에서
초상화처럼 늙고 있다는 것
어쩌면 이런 것으로부터 나는 사막 위를 걷고 있는
낙타일지도 모를 일.
세상에 어떤 사막이 풀도 없는 계절 속에서
길 잃은 철학 하나 구해 내겠는가.
나에겐 세월에 버림받은 철학 몇이 더 있다.
♧ 굴뚝의 은유
굴뚝은 하루치의 은유를 저녁의 허공에게 띄우는
회색 계통의 서신이다.
지상의 축축한 오후들의 추신이며
수신자 부담의 붉은 소임이다.
그러나 노을이 찍히지 않은 세상의 저녁은 적다.
굴뚝은 사랑할 게 많은 집들이
저녁노을에 건너와
가슴마다 그리움을 피워 올리는
낮은 온기의 메시지이다.
그리고 나는 그 집에 오래도록 머문 적이 없는
불 때지 않은 외간 남자의 손님이다
♧ 파랑 꿈
오래전 나에겐 열망의 날들이 있었다
봉선화 핀 언덕 꽃씨의 무게로
떠다닐 수 있는 계절 속의 바람들.
그것들이 내 가슴을 훔치듯
낮게 밀려올 때가 있었다.
이국의 경치까지 가져오고 싶었던 시절
그러나 꿈들은 거칠은 바람이 이르면
소멸되고 마는 모래산과 같은 것인가
봉숭아 핀 언덕을 재개발 시절의 중턱에서 분실했고
꽃씨의 무게만큼 떠다니던 바람도 종적을 감춘 지금.
하지만 나에겐 아직 남아있는 최후의 꿈들이 있다
더 먼 옛날에 날린 것일수록
더 큰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삶의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어떤 의미.
오후가 되면 나의 식사를 챙겨주는
아내의 짧은 통화와 내 젊음이
이룩하지 못한 꿈들을 변호중인
어느 조그마한 그림처럼
나는 그 꿈을 너무나도 좋아했다
♧ 난초
고통을 행복 곁에 메워 둔다.
난초는 겨울을 넘어와야 제 향기에 눈을 뜬다.
향기를 맡을 줄 아는 시간은 얼마나 따뜻한가.
그러나 고통을 행복 곁에
메워 두는 일은 더욱 고독하다.
사막에서 바늘하나 찾는 일처럼 외롭다.
그렇다면 고통을 행복 곁에 메워 두는 일은 반드시
기적 같은 일일까
제 향기에 탈진한 난초를 올려놓고서
그 꽃을 꺾어 둔다.
그래서 추운 행복을 주는
난초 한 그루에 미치도록 묶어두는 것
바로 이것이 내가 난초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 후목 소상호 시집 '태양의 첩자'(히람미디어, 2016)에서
사진 : 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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