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고성기 시집 '시인의 얼굴'에서

김창집 2016. 12. 22. 23:53


비가 추적거리고

우중충한 12월 말이다.

 

딴 때 같으면 거리에

크리스마스 캐럴이라도 울려 나와

제법 분위기를 돋울 텐데,

 

탄핵정국이나

조류 인플루엔자(AI) 때문만은 아닌

어떤 암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 같다.

 

이 시집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냥 모든 것을 내려놓고(放下着)

차분히 한 해를 돌아볼 일이다.

     

 

 

첫눈 오는 날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가슴에만

첫눈은 내린다.

 

쌓이지 않고

눈물이 된다.

 

흐려진 눈 밖엔

모두 다 그리운 사람들

외투에 눈 내려앉듯

그에게로 가 눈물이 된다.

 

첫눈이 내리는 날

온 세상은

그리운 사람과

그리워하는 사람만 남는다.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가슴에만

은행잎이 떨어져

가 된다

 

쌓이지 않고

구슬이 되어 그에게로 간다.

 

파도가 밀려와

그리운 사람과

하얀 포말로 부서져

그리워하는 사람은

 

모두 별이 된다. 첫눈 오는 날은

     

 

 

제주 건천 3

 

활활 타는 산

잠재운 게

바람만이랴

 

흙탕물도

세월이

담긴 만큼 맑아지는 걸

 

깊게 팬

가슴팍에도

제주참꽃 참 붉다

     

 

 

폭설

 

지나친 것뿐이다

()처럼 쌓였을 뿐이다.

그래도 눈 덮인 설원

이랑도 고랑도 없잖으냐

또 울컥

보고 싶어서

눈물 와락 쏟은 것뿐이다.

 

다 덮으려 하지 마라

그래도 녹아야 한다

다람쥐도 도토리 주워야 하고 들꿩도 서너 알 콩 찾아야 하고 숲속 천남성 빨간 자태 드러낼 즈음 할머니 언 손도 풀려야 하지 않느냐

 

숨죽인

화산토 밑에

실뿌리 꿈틀대느니

      

 

 

감나무 앞에서, 12

 

까치밥 다 내려놓아도

한 해가 무겁습니다

새털처럼 가벼워야 칼바람 건넌다고

갈라진

두 손 모으고

살도 깎아 섰습니다.

 

구름처럼 매이지 않고(雲心)

달처럼 곧 비우라(月性)

채움과 비움의 섭리 붓끝 낮게 힘주시던

그 말씀

낙관으로 앉아

묵향보다 짙습니다

 

저 달 청기와 밟아 뜨고

여의도에도 구름 흐르는 걸

放下着 放下着*

감잎 지는 깊은 뜻을

차라리

고개 푹 숙여

못 보았음 좀 좋을까

 

---

*放下着 : ‘다 내려 놓으라는 뜻의 불교 법어

     

 

 

봉숭아 씨 놓으며

 

비 갠 뒤

봉숭아 꽃씨

한 줄 넣고 한 줄 놓고

건드리면 터질지언정

변명 따윈 않겠노라고

이제야

당신 맘 알고

말없음표 찍습니다

 

일 년을

참았어요

아직도 모자라나요

이제 네 몸을 풀면 피와 살이 터지겠지만

그 떨림

아우성으로 필

기다림을 묻습니다

     

 

숲에서 2

 

함께 살아라

어머님 말씀

 

오늘 숲에서 다시 듣는다

 

곧게 자란 삼나무 홀로 청청 소나무 휘어져 뒤틀린 때죽나무 짙은 향 편백나무 상수리 긴 허리에 몰래 뻗은 소엽풍란 떡갈나무 신갈나무 휘어감은 다래덩굴 그늘 아래 새우란 그 옆에 층층이꽃 한 하늘 밑 모두 제자리

 

휘어져

외려 곱구나

곧게 크라고만 하지 마라

     

 

 

달의 노래

 

스스로 태울 수 없어

당신 주위만 돕니다

 

빛만 바라보는 사람

마주보면 암흑인데

 

기다려

등 뒤에 서면

, 다 벗은 보름달

     

 

 

참나무

 

겨울이 다가서면

참나무는 옷을 벗는다

 

인고의 세월, 문 걸어 잠그고 안으로 운다

광야를 더러는 설산을 향해 합장한다.

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방향과 무늬가 달라도 동안거의 화두는

 

정수리

, 치는 깨달음

도토리가 익었다.


  * 고성기 시집 '시인의 얼굴'(북하우스, 2016)에서

     사진 1. 겨우살이  2. 첫눈  3. 건천(광령천)  4. 폭설  5. 감나무

           6. 봉숭아   7. 숲   8. 달   9. 상수리나무(참나무)  10. 도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