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거리고
우중충한 12월 말이다.
딴 때 같으면 거리에
크리스마스 캐럴이라도 울려 나와
제법 분위기를 돋울 텐데,
탄핵정국이나
조류 인플루엔자(AI) 때문만은 아닌
어떤 암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 같다.
이 시집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냥 모든 것을 내려놓고(放下着)
차분히 한 해를 돌아볼 일이다.
♧ 첫눈 오는 날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가슴에만
첫눈은 내린다.
쌓이지 않고
눈물이 된다.
흐려진 눈 밖엔
모두 다 그리운 사람들
외투에 눈 내려앉듯
그에게로 가 눈물이 된다.
첫눈이 내리는 날
온 세상은
그리운 사람과
그리워하는 사람만 남는다.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가슴에만
은행잎이 떨어져
詩가 된다
쌓이지 않고
구슬이 되어 그에게로 간다.
파도가 밀려와
그리운 사람과
하얀 포말로 부서져
그리워하는 사람은
모두 별이 된다. 첫눈 오는 날은
♧ 제주 건천 3
활활 타는 산
잠재운 게
비
바람만이랴
흙탕물도
세월이
담긴 만큼 맑아지는 걸
깊게 팬
가슴팍에도
제주참꽃 참 붉다
♧ 폭설
지나친 것뿐이다
한(恨)처럼 쌓였을 뿐이다.
그래도 눈 덮인 설원
이랑도 고랑도 없잖으냐
또 울컥
보고 싶어서
눈물 와락 쏟은 것뿐이다.
다 덮으려 하지 마라
그래도 녹아야 한다
다람쥐도 도토리 주워야 하고 들꿩도 서너 알 콩 찾아야 하고 숲속 천남성 빨간 자태 드러낼 즈음 할머니 언 손도 풀려야 하지 않느냐
숨죽인
화산토 밑에
실뿌리 꿈틀대느니
♧ 감나무 앞에서, 12월
까치밥 다 내려놓아도
한 해가 무겁습니다
새털처럼 가벼워야 칼바람 건넌다고
갈라진
두 손 모으고
살도 깎아 섰습니다.
구름처럼 매이지 않고(雲心)
달처럼 곧 비우라(月性)는
채움과 비움의 섭리 붓끝 낮게 힘주시던
그 말씀
낙관으로 앉아
묵향보다 짙습니다
저 달 청기와 밟아 뜨고
여의도에도 구름 흐르는 걸
放下着 放下着*
감잎 지는 깊은 뜻을
차라리
고개 푹 숙여
못 보았음 좀 좋을까
---
*放下着 : ‘다 내려 놓으라’는 뜻의 불교 법어
♧ 봉숭아 씨 놓으며
비 갠 뒤
봉숭아 꽃씨
한 줄 넣고 한 줄 놓고
건드리면 터질지언정
변명 따윈 않겠노라고
이제야
당신 맘 알고
말없음표 찍습니다
일 년을
참았어요
아직도 모자라나요
이제 네 몸을 풀면 피와 살이 터지겠지만
그 떨림
아우성으로 필
기다림을 묻습니다
♧ 숲에서 2
함께 살아라
어머님 말씀
오늘 숲에서 다시 듣는다
곧게 자란 삼나무 홀로 청청 소나무 휘어져 뒤틀린 때죽나무 짙은 향 편백나무 상수리 긴 허리에 몰래 뻗은 소엽풍란 떡갈나무 신갈나무 휘어감은 다래덩굴 그늘 아래 새우란 그 옆에 층층이꽃 한 하늘 밑 모두 제자리
휘어져
외려 곱구나
곧게 크라고만 하지 마라
♧ 달의 노래
스스로 태울 수 없어
당신 주위만 돕니다
빛만 바라보는 사람
마주보면 암흑인데
기다려
등 뒤에 서면
아, 다 벗은 보름달
♧ 참나무
겨울이 다가서면
참나무는 옷을 벗는다
인고의 세월, 문 걸어 잠그고 안으로 운다
광야를 더러는 설산을 향해 합장한다.
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방향과 무늬가 달라도 동안거의 화두는 ‘참’
정수리
탁, 치는 깨달음
도토리가 익었다.
* 고성기 시집 '시인의 얼굴'(북하우스, 2016)에서
사진 1. 겨우살이 2. 첫눈 3. 건천(광령천) 4. 폭설 5. 감나무
6. 봉숭아 7. 숲 8. 달 9. 상수리나무(참나무) 10. 도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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