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와 삼백초

김창집 2017. 6. 26. 13:54


탄핵소추의 겨울 - 강덕환

 

외우노다

가로각산

하근디 조름 쓸멍

놉담성게마는

 

엄부랑이

뒈싸복닥

허대겨불멍

들러퀴엄성게마는

 

어마떵어리

오꼿

아사부러시녜게 원

 

재나잘콴다리여!  

 

 

- 강봉수

 

눈을 뜨니 꽃눈 나리는가

청소기 돌리는 아내 눈치 보다가

알 수 없는 일진광풍에

남은 것은 퍼렇게 멍든

초록


 

 

죽은 박정희가 말하기를

 

장하다 내 딸아

내가 십팔 년 동안 쌓아놓은 그 모든 걸

너는 단 4년 만에 다 까먹었구나

 

나는 그렇게 총맞아 죽었지만

내가 뿌린 씨앗은 최소한 백 년은 갈 줄 알았는데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영원히 추앙받을 줄 알았는데

 

너는 5년을 못 버티고

국민들 촛불에 쫓겨나면서 나마저 지우는구나

참 장하다 이 칠푼이 같은 년아

 

이제 이 박정희의 이름이 사라지는구나

이제 이 다카키 마사오의 우상이 사라지는구나

이제 이 십팔 년 박통의 신화가 사라지는구나

 

참으로 장하고 장하다 내 딸아

너는 본의 아니게 국민대통합을 이루고

이제 내 곁으로 올 때가 되었구나

 

나는 여기서 매일 매일 김재규의 총 맞는 일이 반복인데

너는 매일 뜨거운 화탕지옥(火湯地獄)에서 살겠구나

너나 나나 살아서나 죽어서나 뜨거운 맛을 보는구나

이 칠푼이년아 어서 오너라

올 때는 시바스리갈 몇 병 가지고 오너라

넋 나간 우리 추종자들도 다 데리고 오너라

 

이제 우리의 세상은 끝났다

이제 우리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우리는 끝났다! 


 

 

채송화 - 김문택

 

너는 알고 있어

꺾어지지 않으려면

키를 낯춰야 한다는 것을

 

처음부터 터득하고 있어

땅의 숨소리를 들으려면

납작 엎드려야 한다는 것을

 

높이를 줄여야

깊이를 이겨낼 수 없다는 있다는 것을

   

 

 

황토색 세월 - 김병택

    -변시지의 나그네

 

모든 젊은 날에

바람이 불거나 비가 왔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하얀 햇살이 주변을 왕래한 적도 있지만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온 날이 훨씬 더 많았다.

 

오로지 혼자였다.

가족도, 친구도 없었다.

전생을 원망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었다.

 

다친 날 이후,

지팡이를 유일한 친구로 삼고

흐린 날을 골라 오름을 올랐다.

오름을 오를 때마다

배낭 크기의 외로움이 따라왔다.

 

지팡이를 잠시 내려놓고

저 먼 곳에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커다란 물체를 보았다.

황토색 세월이었다.

     

 

참척* - 김수열

    -세월호 참사 3주기에 부쳐

 

끔찍한 일이다

인간이 흘리는 눈물의 8할은

시간이 고이면 더러는 단내가 나기도 한다지만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어리고 여린 것을 가슴에 묻은

그 어미 아비가 흘려야 할 피눈물은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아니 그 흙이 썩어 문드러져

흔적조차 남지 않은 심장을 찌르고

폐부를 찌르고 손톱을 찌르고 머리카락을 찌르고

다시 말라버린 피눈물을 찌르고

 

고통의 무게와 절망의 깊이는

늘 변수가 아니고 영원한 상수여서

바람 불고 눈비가 오고 해가 뜨고 달이 가도

차마 눈을 붙일 수가 없어서 마실 수도 먹을 수도 없어서

온몸이 무너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두렵고 서러운 일이다

나는 여기 망실하게 있는데

너는 내 곁에 영영 올 수 없다니

새순 돋고 유채꽃 피어도 서럽다

하늘빛보다 더 서럽고 바다 끝보다 더 서럽다

죽어 다시 죽을 만큼 끔찍한 일이다

 

아들아, 딸들아

한 번만이라도 내 곁에 앉거라

한 번만이라도 내 품에 안겨라

사랑한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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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척(慘慽) : 자손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

     

 

변산바람꽃 - 김순선


산 비탈길에 간간이 내리는 눈

햇빛에 반짝이듯

절물 양지 바른 둔덕에

바람 헤집고 고개 내민 하얀 별무리

마른 줄기 검불 사이에 숨어

가녀리게 반짝인다

 

고개 숙이지 않으면

무릎을 꿇지 않으면

무심코 밟고 지나칠 수도

 

그와의 첫 번째 조우

떨림으로 다가올 때 겸손하게

눈 속으로

마음속으로

팔랑거리며 날아온다

     

 

빨갱이 폭도 - 김승립

 

1

 

유신 때 일이다

 

정례 교련조회 불참했다가 먼지 나게 맞았다

장교 출신 교관이 빳빳한 군복에 다이아몬드 계급장을 빛내면서

국가관이 불순하다고 빨갱이 새끼라고

욕설을 해댔다

짝꿍 녀석은 두발 불량으로 폭도 새끼로 규정되었다

 

땅거미가 서서히 몸을 눕히는 시각

학교 외진 곳 담벼락에 등을 부리고 꽁초 빨면서

짝꿍 녀석이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빨갱이 새끼가 아니지만

나는 폭도 새끼가 맞아

 

무자년 미친 세월 때 산간 살던 아비

배곯은 무장대 소년연락원에게 수수범벅 한 더이 적선했다가

폭도로 몰려 형 살고 나온 이력이 있으니

자기는 영락없는 폭도 새끼가 맞다고

 

짝꿍이 촉촉이 젖어 이글대는 눈동자에

노을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2

 

지랄 맞은 강산도 덧없이 바뀐 이 세월

 

권부의 탐욕과 무능 무책임을 꾸짖고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영혼을 진혼코자 사람 사람들마다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 녹여가며 광장에 촛불을 밝혔더니

한켠에서 또다시 빨갱이 폭도라고 마구 손가락질을 해댄다

 

아으, 저 놈의 빨갱이!

아으, 저 몸의 폭도!

이게 말이냐 막걸리냐

 

이 지긋지긋한 깡말을 아예 무덤 속에 처박거나

부는 바람에 영영 날려버릴 수는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