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새끼 꼬아 엮듯
서로 등 짚으며
한고비 넘어가고
가슴 껴안으며
한세상 엮어가는
느영나영 아리랑
-강연옥, 오한욱
♧ 신의 언어 - 강연옥
봄날 막 돋아난 잎사귀들이 윤지다
저 잎들은
나무가 허공에 써낸 말씀들
그 말씀 따라 부르는 새들의 지저귐
그대여, 밤새 젖은 날개 털고
초록의 심연에 도랑도랑 울리는 은종 소릴 들어 보라
말씀들이 그윽해질 때 꽃이 피고
어둠이 돌아와 말씀들이 젖어 적막해질 때도
눈물겹도록 적막해질 때도
꽃향기는 바람 불어 가슴에 철썩이는 파도
그대여, 그런 나무 앞에서 우리 모두
한 마리 새가 되고 싶지 않겠나
♧ 오름에서 - 강연옥
마음에 창窓이 많은 사람은
바라만 보아도 윤이 난다
봄날 오름에도 창이 여럿 생겼다
산자고 민들레 할미꽃들이 환하다
♧ 가을 - 강연옥
창窓이란 다시 연다는 전제하에
안으로부터 닫기도 한다
나뭇잎이 하나둘 떨어지네
겨우내 빛을 모시고 안을 닦기 위해
나무가 창문을 닫고 있다
♧ 바람 부는 날 - 강연옥
사소한 것에 다쳐 마음에 바람 부는 날
감나무 아래 서니 잎사귀 비비는 소리 크다
잎사귀에 걸린 바람 소린가
포르르 어린 잎 하나 떨어질 때 알았다
위태위태 감꽃 떨어질세라
갇힌 바람 건네주려 잎사귀가 통로를 열었다는 것을
새끼 누 한 마리 악어에게 물리는 동안
마라 강을 무사히 건너가는 누 떼
우두커니 바라만보는 어미 그 젖은 눈동자
어찌 나무라고 아프지 않으랴
어린 잎사귀 허공에서 팔랑거리며 떨어질 때
뿌리에서 울컥 물이 오르지 않았겠는가
산다는 것은 구원의 행진인가
내 깊은 곳에도 나무가 자라나 보다
불어서 아프기보다 갇히어 아픈 바람
여린 마음 하나가 흔들리고 있다
♧ 세상 발길들이 - 오한욱
산을 오르던 등산객의 발길도
바닷가를 슬렁슬렁 거닐던 늙은 부부의 정담도
비를 맞으러 밖에 내놓았던 화분도
골목에 달라붙던 아이들 발길도
평화식품 앞에 모여 있던 아낙들 수다도
집으로 간다
이 세상
모든 발길이 집으로 간다
텃밭 토마토 익으며 땅으로 수그리는 이유이듯
♧ 침목沈木 - 오한욱
한곳을 향해 달리는 두 발길의 평행선이
맞닿을 땅이 곧 있을 거라는 소망을
잠자면서까지 간직하려 오늘도 두 눈 꼭 감고
기차의 무게를 받아들이는
합장한 손들
그런 줄 알았더니 되레
평행이 어긋나지 않도록 어떻게든
균형을 유지하려는
못 박힌 손들
♧ 맷돌 - 오한욱
지그시 얹어놓았지
내 몸을 갈아내어
너에게 조금씩 넘겨주려
몸은 몸끼리
마음은 마음끼리
돌돌돌 삭삭삭
윗니가 아랫니에 말을 걸듯
늘 어긋나며 비켜가도
제 모습 다듬으며 돌아가는
저 가슴 둥근 앉은뱅이 되고 싶어
♧ 사랑치레도롱뇽 - 오한욱
어두운 동굴 속에서만 살아가는 꼬리치레도롱뇽은
몸통보다 필요 없이 긴 꼬리를 주체할 수 없는 듯
헤엄치는 모양이 우습기도 하다만 나는
당신의 동굴 속에서 주체할 수 없이 긴 사랑이
죽음 뒤에도 붙어있는 사랑치레도롱뇽으로 살고 싶다
*강연옥 오한욱 부부시집 - 현대시 시인선 173,
‘아낌없는 하루’(한국문연, 2017)에서
*사진 : 요즘 한창인 ‘땅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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