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오광석 시집 '이계견문록'

김창집 2017. 9. 23. 17:28



시인의 말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었다

 

아니면

새로운 세상으로 건너가든가

 

그도 아니면

새로운 세상으로 바꾸고 싶었다

 

2017.9

오광석

 


 

해장국을 먹는 법

 

실핏줄들이 두 눈 속에

궤도처럼 깔리면

총탄에 스친 듯 흔들리는 머리를

굳은살 박힌 손으로 눌러준다

뜨거운 열기가 식도를 타고

위벽을 두드리면

차가운 소주 한 잔을

냉각수 삼아 부어준다

힘겨운 전장의 동지가

부상을 견디지 못해 엎드리면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뒤통수 한 대 갈겨주고

검붉은 선지 한 토막을

아트로핀 주사마냥 우겨넣어 준다

비릿하면서도 부드러운 피 맛이

몸 안에 퍼지면

전장의 감각이 깨어나

국물과 소주를 번갈아 마신다

어제가 되어가는 오늘과

오늘로 다가오는 내일이

새벽 식당 모서리에서 교차할 때

각진 얼굴의 노련한 병사와

전선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붉은 얼굴의 부상자가

노가다 작업복 차림으로

지난 전투의 무용담을 늘어놓을 때

피 같은 땀이 뚝뚝 방울져 떨어지고

내일의 전투를 기대하며 먹는

해장국은 식어간다

 

 

 

발록*

 

  황홀한 사랑을 찾아 세상의 경계를 찢었지 불타는 사랑을 하고 싶어 스스로 불이 되었지 거대한 뿔은 의지가 자라 생긴 돌연변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춤을 추는 화신 불의 세상에서 튀어 오른 그는 심장이 활활 타오르다 불사의 생물이 되었지 불꽃의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터지는 마음의 빙벽 불타는 몸을 껴안고 심장 깊숙이 불길을 마시면 온몸을 돌고 도는 불의 혈액들 용암처럼 끌어 오르는 유혹이 터져 붉어진 얼굴로 내미는 입술 작은 구멍과 구멍이 만나는 뜨거운 입맞춤 오므리다 벌어지면 불타는 혀가 입속에 불길을 토해내지 불의 날개가 자라나 날아오르게 하지 무너지는 세상을 느끼며 눈을 감으면 다른 세상의 문이 열리지 무거운 현실의 짐을 벗어던지고 마법 같은 사랑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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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괴수.

 


 

거대한 죽을 저었네

 

  죽을 저었네 거대한 솥단지에 죽을 저었네 아이들의 배를 채우러 죽을 저었네 어미 빠져 죽을 저었네 죽을 걸 알면서도 살을 발라 죽을 저었네 오래오래 굳세게 살아라 아이들의 삶을 위해 발라낸 어미의 살을 녹여 죽을 저었네 발라내고 발라내 녹이고 녹여 어미는 죽어 죽이 되어갔네 거대한 솥단지에 어미는 죽이 되어갔네 아이들이 와서 죽은 어미의 살을 녹여 죽을 저었네 오백 형제 그릇에 골고루 부어 담아 박박 긁어먹고 허연 뼈마디가 그릇 속에 달그락거릴 때 어미의 살이 녹아 아이들의 삶이 되게 어미의 삶이 녹아 아이들의 살이 되게 어미의 몸으로 거대한 죽을 저었네 어미는 죽어 죽이 되었네 아이들은 어미죽을 먹고 자라 거센 비바람에 흔들림 없이 세상에 박혀 드는 바위로 자라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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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백장군설화를 각색함.



* 오광석 시집 '이계견문록'(천년의 시작, 2017)에서

 사진 : 오늘 이승악에서 본 꽃들 - 차례로 누린내풀 새콩 당잔대 이질풀 쥐꼬리망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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