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섬[牛島]이 아프다 - 김혜천
도대불에서 잠시 손을 모으고
정상에 우뚝 솟은 등대를 향해 오른다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갈기 세운 파도의 끝없는 일렁임
등대를 업은 후해석벽
홍조류*의 퇴적물로 이루어진 한 송이 홍조단괴 해빈
비바리 외마디로 패인 고래동굴
물길 닿은 곳마다 푸른 멍으로 얼룩진 무늬를 안고 일가를 이룬 검은 해안 검멀레해안
명마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목장
돌담이 바람을 막는 땅콩밭
하루의 노동이 수평선에 잠기면
홍해삼 움켜쥐고 돌아가 안길 초가집
나는 그곳으로 가는 길을 잃었다
해신당은 무너지고
흙먼지 날리며 달리는 렌터카들
이미 지워진 중앙선
난장, 난장이 춤을 춘다
일출을 향해 울부짖는 쇠머리언덕이 모로 누웠다
멀리 성산포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비경의 빼곡한 페이지를 빠르게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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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미역, 다시마, 우뭇가사리 등
♧ 외 사랑 - 송정민
영롱한
물방울은
햇살에
색 바래고
앙상한 가지들은
바람에 흔들리니
춤추며
물들어가는
나뭇잎이 섧구나
구름이
스러지는
끝없는
네 그림자
하늘을 그려보니
마음이 애틋하여
가을은
스치고 가는
번개 같은 것일까
♧ 그리움 - 홍성재
멈춰버린 시곗바늘인 양
그날의 모습 그대로
내게로 웃고 서 있는 당신
그 모습 잊으려 몸부림치다
눈물짓던 당신
불쑥 떠오를 때면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옷매무새를 고치다
피식 웃음을 흘려버리고 맙니다
혹 오늘 당신이 올까 봐
혹 오늘 당신을 볼까 봐
심장이 뛰는 만큼 당신이 그립습니다
♧ 고장 난 피아노 - 장정순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엄마의 귀에 겨울이 왔다
겨울에는 소리도 날기를 멈추는가 보다
소리 없이 눈에 덮이는 골목에서
여든 해를 살아도 일곱 살 음표처럼 쨍쨍하던
엄마의 피아노는 길을 잃었다
소리도 얼 수 있다는 걸 나는 몰랐다
물처럼 흐르지 못한 소통이
달팽이관에 닿고 싶어
눈처럼 내려 쌓이자
어깨 위에 수북한 절망이 노래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 도, 레, 미
침대에서도 아, 야, 어, 여
새벽녘까지 건반을 시험하는 엄마 목에서
고장 난 피아노 소리가 났다
흔들리는 겨울나무 옆에선
이명이 밤새 눈물을 흘렸다
평생 노동하던 귀가 자유를 찾은 것처럼
엄마의 노래도 하늘을 나는 걸까
엄마는 오래 굽은 날개를 꺼내 귀에 대어 본다
♧ 아버지 - 정병성
나도 늙나 보다
늙으면
미움도 늙는다더니
몸속 뼈
달콤하게
삭아간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단맛이 다 되었나?
자꾸만 사람이
기다려지네
머리말 올알옹알
박하사탕 한 알
♧ 나무 - 나병춘
나무는
제자리에서
오늘을 완성한다
내일 모레
아무 염려 없이
문자 숫자 기호들
헤아리지 않고도
관세음보살 손바닥처럼
훤히 꿴다는 뜻
든든히
그림자 지키며
먼 허공 굽어보면서
♧ 무적의 불길 - 임보
떨어져 있으므로 더욱 강해진다던 말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계실 땐 못 느끼던 그리움의 불길이
밤낮으로 제 가슴을 때웁니다
어느 물로도 끌 수 없고
어느 술로도 재울 수 없는
무적의 그 불길
이 몸속에 지피시려 떠나신 것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님이여, 부디
이 춥고 추운 삼동
그 불길 늦추지 말고
이 몸 훨훨 다 태우소서
♧ 시인의 베틀 - 이상옥
철거덕철거덕 시를 엮는다
무명 9새 무명無名 10년
청풍 호수에 걸린 초승달을 푸니
목화솜 같은 시가 첫물 든다
물레질 실톳에 밤이 저물고
날틀에 뽑힌 시,
바람이 감기고 별이 담긴다
무명의 시인으로 산다는 건
가슴 저리게 물레 돌리는 일
활을 태우고 시어를 합사한 행간에
한 필의 피륙을 빚는 일
* <우리詩 10월호> 통권 제352호에서
사진 : 요즘 한창 피어오르는 억새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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