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이민화 시집 '오래된 잠'

김창집 2017. 10. 18. 16:58



시인의 말

 

내게 세상은 봄이었고, 온통 분홍빛이었다.

 

분홍빛은 오래가지 않았다.

 

잃고 채우기를 반복하며 여기까지 왔다.

 

다시 분홍이기를.

 

20178

이민화

 


 

 

오래된 잠 - 이민화

 

다섯 송이의 메꽃이 피었다.

아버지의 부재를 알리는 검은 적막을 깨고

돌담을 딛고 야금야금 기어올라

초가지붕 위에 흘림체로 풀어놓는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바람벽이

움찔 다리를 절면

마당가에 선 감나무도 키를 낮춘다

아버지의 귀가에서 나던 솔가지 타는 냄새

너덜너덜해진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수도꼭지

끄윽끄윽 울음을 뱉어낸다

산 그림자 마당으로 내려서면

거미줄에 걸린 붉은 노을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먼지 쌓인 잠을 쓱쓱 문질러 닦아내면

아버지의 오래된 시간이 푸석한 얼굴로 깨어난다

늙은 집이 메꽃을 피우고 있다

 


 

 

푸른 상처

 

검은 봉지 속에는 검은 해가 뜨나 보다

시퍼런 독은 온몸으로 퍼지고

터져 나온 핏줄이 허공에 매달린 채

꽃을 피우지 못한다

탱탱했던 모습은 쭈글쭈글 주름이 잡히고

몸속까지 파고 든 시퍼런 멍

이제 어쩌지 못한다

나는 검은 봉지 속 세상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초록의 독이 오르고

다시 초록의 싹이 돋고

꿈을 꿀 것이다

 

그녀가 가져다준 감자

검은 봉지에 담아온 그대로

베란다에 툭 던져놓고

 


 

 

배고픈 식사

 

콩가루 풀어 넣은 얼갈이 배춧국

오래된 손님에게만 내놓는다며, 주인은

걸쭉한 입담만큼이나 사발 가득 국을 퍼준다

사발 속에 몽글몽글 맺혀있는 꽃망울

백일 된 내 아기가 게워놓은 흰 젖을 닮아

선뜻 수저를 들 수가 없다

젖꼭지가 헐도록 젖을 빨던 아기는

한동안 똥 싸는 걸 잊은 채

그 작은 입으로 먹은 것을 죄다 토해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미안한

그런 어미를 위로하듯

젖가슴만 파고들던 나약한 봄날이었다

겨울을 견딘 얼갈이배추의 진한 풋내

내 아기의 푸른똥 냄새가 난다

애써 외면하던 시간을 열고

비쩍 말랐던 젖이 핑그르르 돈다

 

내 아기가 게워놓은 한 무더기의 봄

수저를 들 수가 없다

 


 

 

만선

 

해당화가 잠을 털어내고 있는

바닷가 벤치에 헐렁한 어둠이 앉아 있었다

 

잔물결 속 어둠을 밀어 올리며

저 거대한 붉은 것이 넌출 거리며

아득한 수평선을 빠져나와

어부가 던져놓은 그물에 걸려 올라온다

 

오늘 날씨는 대체로 맑음이다

 


 

 

내일은 비

 

밤새 잠을 설친 어머니가

무릎에 파스를 붙인다

 

맑은 하늘에 구름이 모여든다

 


 

 

거짓말

 

부자로 살던 박 씨가 죽었다

 

그의 젊은 아내는

혼자서 어떻게 사냐며

저도 데려가라며 소리 내어

슬피 운다

 

손가락질도

뒷담화도

상관없다는 듯

 

봄볕 받아먹듯

따박따박 끼니를 챙겨 먹는다

 

 

                * 이민화 시집 오래된 잠’(황금알, 2017)에서

               사진 - 요즘 한창 피어나는 고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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