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내게 세상은 봄이었고, 온통 분홍빛이었다.
분홍빛은 오래가지 않았다.
잃고 채우기를 반복하며 여기까지 왔다.
다시 분홍이기를.
2017년 8월
이민화
♧ 오래된 잠 - 이민화
다섯 송이의 메꽃이 피었다.
아버지의 부재를 알리는 검은 적막을 깨고
돌담을 딛고 야금야금 기어올라
초가지붕 위에 흘림체로 풀어놓는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바람벽이
움찔 다리를 절면
마당가에 선 감나무도 키를 낮춘다
아버지의 귀가에서 나던 솔가지 타는 냄새
너덜너덜해진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수도꼭지
끄윽끄윽 울음을 뱉어낸다
산 그림자 마당으로 내려서면
거미줄에 걸린 붉은 노을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먼지 쌓인 잠을 쓱쓱 문질러 닦아내면
아버지의 오래된 시간이 푸석한 얼굴로 깨어난다
늙은 집이 메꽃을 피우고 있다
♧ 푸른 상처
검은 봉지 속에는 검은 해가 뜨나 보다
시퍼런 독은 온몸으로 퍼지고
터져 나온 핏줄이 허공에 매달린 채
꽃을 피우지 못한다
탱탱했던 모습은 쭈글쭈글 주름이 잡히고
몸속까지 파고 든 시퍼런 멍
이제 어쩌지 못한다
나는 검은 봉지 속 세상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초록의 독이 오르고
다시 초록의 싹이 돋고
꿈을 꿀 것이다
그녀가 가져다준 감자
검은 봉지에 담아온 그대로
베란다에 툭 던져놓고
♧ 배고픈 식사
콩가루 풀어 넣은 얼갈이 배춧국
오래된 손님에게만 내놓는다며, 주인은
걸쭉한 입담만큼이나 사발 가득 국을 퍼준다
사발 속에 몽글몽글 맺혀있는 꽃망울
백일 된 내 아기가 게워놓은 흰 젖을 닮아
선뜻 수저를 들 수가 없다
젖꼭지가 헐도록 젖을 빨던 아기는
한동안 똥 싸는 걸 잊은 채
그 작은 입으로 먹은 것을 죄다 토해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미안한
그런 어미를 위로하듯
젖가슴만 파고들던 나약한 봄날이었다
겨울을 견딘 얼갈이배추의 진한 풋내
내 아기의 푸른똥 냄새가 난다
애써 외면하던 시간을 열고
비쩍 말랐던 젖이 핑그르르 돈다
내 아기가 게워놓은 한 무더기의 봄
수저를 들 수가 없다
♧ 만선
해당화가 잠을 털어내고 있는
바닷가 벤치에 헐렁한 어둠이 앉아 있었다
잔물결 속 어둠을 밀어 올리며
저 거대한 붉은 것이 넌출 거리며
아득한 수평선을 빠져나와
어부가 던져놓은 그물에 걸려 올라온다
오늘 날씨는 대체로 맑음이다
♧ 내일은 비
밤새 잠을 설친 어머니가
무릎에 파스를 붙인다
맑은 하늘에 구름이 모여든다
♧ 거짓말
부자로 살던 박 씨가 죽었다
그의 젊은 아내는
혼자서 어떻게 사냐며
저도 데려가라며 소리 내어
슬피 운다
손가락질도
뒷담화도
상관없다는 듯
봄볕 받아먹듯
따박따박 끼니를 챙겨 먹는다
* 이민화 시집 ‘오래된 잠’(황금알, 2017)에서
사진 - 요즘 한창 피어나는 고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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