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11월호의 시 2

김창집 2017. 11. 12. 20:51



꽃 진 자리 - 라윤영

 

담장을 훌쩍 뛰어넘던

키 작은 아이

사라진 그 자리

 

고통은 기억을 밟고

조금씩 지워졌던

딱딱한 발자국

숲을 탐색하고 있다

 

울창한 수풀

모든 걸 숨기려 해도

보이는 것들

튼튼한 살갗 하얗다

 

둥근 여자

부서진 망막

오늘 밤은 살해되고 있다

 

빛이 없어도

길은 열려 있다

 

시간은

자물쇠를 열어주지 않지만

붉고 푸른 입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발바닥

웃으며 사랑하고 있다

 


 

 

폭염 - 조성례

 

그 남자는 들통에다 한낮을 연이어 퍼 담아

하늘 정원에 부린다

퍼 나르는 짐마다 그 남자가 거꾸로 매달린다

허공에 치솟은 사다리 위에서

그의 눈은 늘 안개를 매달고 산다

 

그의 하루하루는 살을 뚫고 달려드는 한낮이다

 

일세기를 넘나드는 노모와

저만치 기억의 끈을 끊어놓고 있는 아내,

한발을 허공에 대고 삿대질을 하는 아들이

그의 정오를 지난다

 

돌아오는 얼음과자를 기다리는 어제와 내일

가슴에다 붉은 해를 끌어 안고 사는 그는

매일이 38,5°C이다

얼음물로도 그 뜨거움을 식히지 못한다

 

종아리에 불끈 솟아나온 푸른 심줄에

한낮이 걸어 내려올 때마다

하늘에 대고 나팔을 부는 남자

오늘을 짊어지고 온 한낮이 거푸집에

발자국을 찍고 있다

 


 

 

눈꽃가루 - 강동수

 

여름 한낮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는

사람들이 제철을 잊은

눈의 결정을 맛본다.

 

-눈꽃가루-

 

이것은 새롭게 발명한 눈의 세계

얼음을 불러 모아 제빙기에 넣으면

폭포처럼 떨어지는 눈가루

백설기를 띄워 간을 맞추면

사람들은 태양을 잠시 주머니에 접어두고

서너 평 카페에서 잊고 지내던

지난 계절을 생각한다

 

언제든지 지난여름의 폭풍을 불러오거나

후일에 기록될 해일을 불러올 것 같은

마법의 여주인은

상냥한 미풍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나는 여름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에 앉아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겨울 꽃의 향기를 맡는다

 


 

 

잇몸 간지러운 아가에게 - 김동호

 

산소의 강풍에

촛불 매섭게 솟듯

자연의 칼날에

호랑이 사자들

매섭게 이빨 세운다

 

아가야

잇몸이 간지러우냐

 

매서운 이빨이

돋아오르는 모양이다

 


 

 

구절초 - 오세영        


하늘의 별들은 왜 항상

외로워야 하는가.

왜 서로 대화를 트지 않고

먼 지상만을

바라다보아야 하는가.

무리를 이루어도 별들은 항상

홀로다.

늦가을 어스름

저녁답을 보아라.

난만히 핀 한 떼의 구절초꽃들은

푸른 초원에서만 뜨는 별,

그가 응시하는 것은 왜 항상

먼 산맥이어야 하는가.

 


 

 

처음 홀로 떠나는 여행 - 이강하

      -섬진강

 

자전거 타고 달리는 소년과 소녀

이마 위로 바람이 갈라진다

꽃잎 벗어던진 열매들이

자유에 든 것처럼

 

있고 없음이

필요 없는

자전거 페달의 가벼움은

혈육을 돌리고

친구를 돌리고

아픈 역사를 돌리고,

누군가를 절실히 돌리고 싶어한다

접힌 주름 그대로

발길 닿는 대로

 

그저 아무 조건 없이

진종일, 나는

섬진강 구석구석을 돌린다

묵상에서 돋아난 신록,

소년들과 소녀들이 자꾸 늘어나는

 

내일이면 탱자나무도

하하 웃으며 달리기를 시작할 것이다

굽이굽이 덜컹거렸던 우리,

은어 떼는 더 성숙해질 것이다

오봉산과 구름이 맞닿는

그 틈과 틈 사이로 장미꽃 번지듯

 


 

 

구름 - 손창기

 

   구름 한 뭉치를 어머니는 절구통에 넣고 있었다. 절구통에 있던 구름이 가끔 튀어 오르기도 했다. 자궁 속처럼 시간이 갈수록 구름은 잘 빻아졌다. 구름은 자기끼리 뭉치고 헤어지곤 했다. 흙담을 드나드는 안개처럼 몸속에서 물기가 맴돌았으면 했다. 잘 빻아진 구름이 햇살과 함께 증발하기 시작하자, 구름이 어머니의 물기를 빨아들였다. 구름이 허파를 점점 조여 들게 하더니 어머니를 삼켰다. 부지깽이 두드리며 장작불을 지피자 굴뚝이 연기를 마구 뿜어냈다. 연기 품은 구름이 점점 비대해지자 어머니를 내놓았다. 프라이팬에 깨를 볶듯이 마당에서 물방울이 춤을 추었다. 몸속에 물방울이 맺혀 어머니가 식구들에게 슬픔의 구간을 줄였는지 모른다.

 


 

 

소걸음 - 이동훈

 

바쁠 게 뭐가 있겠어요.

약삭빠르게 잇속 챙기는 재주 없이

어깃장 놓고 실속 챙기는 주변 없이

부지런 떨지 않아도 갈 길 가고 할 일 하며

그저 뚜벅뚜벅 걷는 것이지요.

나의 든든한 맹우*

나무그늘에서 느릿느릿 되새김질한 시간이

집채만큼 덩치를 키우고

불뚝하게 뿔을 세웠지만

진짜 믿는 구석은

비탈밭도 묵정밭도 도랑물도 붉덩물도

예사로 흔덕대며 뚜벅뚜벅 걷는 것이지요.

어쩌다 위아래 치는 꼬리질이

툭툭 던지는 농담 같아

한세상 건너는 구색은 된 것이지요.

당신에게 가는 길도

나에게 오는 길도 소걸음이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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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북 <맹우도猛牛圖>



                                 * '우리詩' 2017년 11월호(통권 제353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