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에 내리는 눈
그리움이 못내 사무친 그린나래
그대는 먼발치 바람으로 머물러
구름이 되더니
쓸쓸한 눈발이 되어 흩날리느냐
2월 단장(斷腸)이 서글픔만 할까 보냐
가람의 그 투명한 얼음 꽃을 그려넣던 설경이
승천하지 못한 그리움으로 굽이치누나
한의 의미로 굽이치누나
굽이치다 기억에 묻힐 아픔이누나
더는 묻지 마라 가막새 우는 자리
2월의 행적엔 천년의 한이 뭉쳐 흐르나니
목메게 보듬다 갈피 없는 자국눈으로 흘러흘러
훗날을 도모하고 꽃잠을 깨우나니
봄을 일으키나니
♧ 봄 마중
얼었던 강물이 녹으면
보랏빛 물안개 분분할 봄날이여
의식의 지층을 허물던 절망에서
추위와 어둠이 만연했던 거리
얼룩진 눈물의 자리마다
비움의 골짜기에 살에는 바람의 날개가 걷히면
생명의 면류관에 연둣빛 싱그러운 얼굴로
이슬을 마시고 사랑을 위한 현을 켜라
잠든 것들의 수면 위에
눈물의 정점에 굳어갔던 주검 위에
허기진 자리마다
따사로운 파장으로 육체를 회복하고
봄으로 현 화 되는 아리아로 수를 놓아라
2월의 심장에 안부를 놓고
동면했던 생명에 혼의 예각을 깨우고
긴 겨울은 이미 갔다고
가슴 뭉클한 꽃 편지나 하나 띄워라
♧ 봄을 위한 연가
햇살 환한 창가에서 한나절을 앉아
호 입김을 불고 손가락으로
봄
바람
아지랑이라 씁니다
추위의 너울을 걷어내면
샛노랑 색으로 부풀어 오르거나
연둣빛 바람이 상큼하게
온 대지와 가슴에 바람으로 다가올
봄의 전령들의 발걸음 소리 저 멀리서
소곤소곤 설렘을 주장하고
거리에 지독한 냉기로
그토록 춥기만 하던 공기 속에서
봄의 미소가 살포시 묻어납니다
♧ 2월 설야(雪夜)
창 넘어 하이얀 눈송이들이
시린 얼굴로 밤을 부르고 있다
어김없이 올해도 봄을 시샘하는 눈발이
밤새 온 세상을 덮었다
봄의 화려한 유혹에도
나의 냉골엔 아픔만 서성대고
군불조차 지필 수 없는 얼룩진 가슴으로
희미한 그리움이 마지막 기차처럼
저 눈길을 헤치며 어디론가 달리고 있다
은둔했던 가난한 날들의 시름겨운 눈동자가
어두운 창가로부터 추억의 토막들을 실어 나르며
발기된 성기처럼 투영됐다 사라져 간다
아, 나는 이 더러운 질병의 범주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어느 겨울의 골목 아직도 밤길을 헤매이며
내리는 눈에 고립된 채 까부라지고 있나
정적에 사로잡힌 침묵의 새벽
희뿌옇게 밝아오는 창가를 응시한다
이제야 말로 나는 희망을 노래 불러야 한다
그런데 유리창은 왜 저렇게
지저분해져만 가는 것인가
♧ 2월 안개
저 숲은 개갈 난 가슴으로 장승처럼 거기에 서서
뱅뱅 감아오는 축축한 안개를 받아들였다
몇 개의 햇살이 반짝이다 꺾여 갔다
어떤 나무는 헐벗은 제 몸 위에 부끄러운 도표처럼
몇 개의 마른 잎사귀들을 후줄근하게 매달고 서있다
침묵 위에 침묵이 더 두껍게 맴돌고
휘적휘적 걸어가 들춘 1204호 우편함에 광고 용지들
그리고 순복음교회 일회용 휴지가 얌전하게 놓여 있다
나의 절정은 언제였나
2월의 전령들이 봄을 부르는 소리가 저 안개 숲에서 조곤조곤 들렸다
식은땀으로 번져가는 추상화에 쨍하게 화인 된 사랑한다는 말이
침대 모서리를 돌아와 누워 바라보는 간 유리에
방울방울 투영되는 햇살의 찬란한 절정으로 와 닿길 기다리면서
싱싱한 첫 것이 아니어도 쭉쭉 곧게 뻗어 오르던 가지들
후두두 뜨거운 열기가 성욕으로 휘몰아치던 지난여름 숲이 떠오른다
♧ 추억의 눈꽃
그리움으로 내리던 눈의 추억이
유독 올 겨울엔 환합니다
생인손 앓듯 시시때때로
눈물로 멍울 지던 추억을 마주하면
떠나간 것들의 안부엔
건조한 바람 냄새 휘돌아 내리고
절망이 비둘기호 열차처럼 온 밤을 덜컹대며
끝없이 어둠의 선로를 달리던 길
내내 환희를 줏어 들창을 밝히던 눈꽃들이
까마귀 쪽 나무에 소복하던 고향 어귀
일출봉은 종일 푸른 파도를 읽고
눈꽃들이 하얀 여백을 그려 넣던 골목마다
까막눈이 아이들이 나무 팽이를 돌리고
눈만 쌓이면 세상모르게 좋아라. 웃던
소싯적 까마득한 웃음소리들이
우울하고 시무룩해진 얼굴에
까르르 하늘하늘 날아오르고 있습니다
♧ 그대의 겨울
저 깊은 겨울 숲
눈 내리는 어디쯤
그대는 결빙된 나목으로
날 기다리는지도 몰라
저 골목 어디쯤 함박눈 쌓일 때
가난한 등불 하나 내어 걸고
충혈된 눈빛으로 밤을 헤매다
비루한 발길에 채이며 스스럼없이 녹아내릴
그대는 환한 눈송이로 오로지 어둠 가운데
날 기다리는지도 몰라
어느 세월쯤
몇 번의 가십거리로 떠돌다
수몰되는 아픔으로 추위에 떨며
옹색한 변명으로 나 구부려 잠들 때
따뜻한 미소로 내려와
나를 감싸는 저 달빛
당신은 영혼의 씨실로 짜낸 이불을 만들어
내 가슴을 따뜻하게 덮어줄지도 몰라
* 시 : ‘소화 고은영 Gallery & Poem’(http://cafe.daum.net/kong1177)에서
* 사진 : 눈과 오름이 있는 풍경(2018. 2. 9. 거슨세미오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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