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정찬일 시집 '가시의 사회학'

김창집 2018. 3. 3. 10:15




젖은 눈, 바위그늘집

 

  잊을 수 없다.

 

  산 등짝을 후려치며 장대비가 내린다.

  열흘째 내리고 있었다.

  (좁은 시멘트 길을 따라 언덕 위의 낡은 집으로 오를 때도 그랬다.)

  시퍼렇게 스렁거리는 억새가 무너질 때마다 바위그늘집으로 모이던 많은 사냥의 길들이 지워진다.

  (더는 떠내려 올 것 없는 담장 밖으로 맑은 물이 새어나왔다.)

  성난 구름은 억새들을 떼 지어 눕히고, 또 눕히며 일렁이는 강 너머로 근육처럼 몰려갔다가 다시금 돌아온다.

  (한 뼘만 한 쪽마루에 나앉은 나는, 날마다 백열등이 어둡게 비치는 방으로 들어가는 굳은 등짝들을 보았다.)

  벌겋게 상처 입은 산의 등줄기도 어둠과 어둠 사이에서 몇 번이곤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가끔 막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가 낮은 담 너머로 들려왔다.)

  몸을 데우던 구덩이 속의 불은 이미 꺼진 지 오래다.

  (일 년이 멀다고 바뀌는 얼굴들, 그리웠다.)

  열흘째 장대비가 내리고 있다.

  부풀어 오른 몸의 상처마다 젖은 눈들이 보이고,

  빗물에 씻긴 짐승의 하얀 뼈들이 바위그늘집 밖으로 먼저 떠내려간다.

  (내가 그 언덕 위의 동네를 떠나올 때도 그랬다.)

  열흘째 장대비가 내리고, 나는 길 없는 밖으로 뛰쳐나와 다시는 바위그늘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밖은 온통 비였다.

 

  그 바위그늘집, 잊을 수가 없다.

 

 

 

겨울 산을 오르다가 생각하다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겨울 산을 오른다.

잎새 몇 달린 굴참나무 숲이

시린 햇살 속에서 마른 생각에 깊이 잠겨 있다.

세포분열을 기다리는 단세포생물,

몸을 뚫고 뻗어 나온 깡마른 나무의 언어들을 본다.

잎들을 떨쳐내면 보일까.

바람과 바람 사이를 깊이 들여다보듯 내 언어들을 들여다보지만

무성한 잎새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몸의 껍질은 포장된 길처럼 더욱 단단히 굳어져 간다.

바람 속에서 내 몸은 평생을 견딘다.

생장점이 모두 뭉그러진 내 언어들,

겨울 산정의 햇볕 아래 풀어놓는다.

나무들의 자궁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속에서 언어가 세포분열 하는 소리가

. . 들려온다.

 


 

 

눈물, 하얀 벽

 

  내 고향엔 오래된 그림 같은 십자가 하나 그렇게 서 있다. 18년이 지난 뒤에도 가난한 사람들은 또 그렇게 웅크리고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다. 낡은 피아노를 치며 하얀 벽 너머를 바라보는 늙은 여집사의 눈빛, 눈물이 그녀의 몸속 그득 고여 항시 출렁이고 있다.

 


 

 

수선화

 

 눈이 내린다.

 비탈진 곳의 나무들

 수직으로 선 채 꿈을 꾼다.

 

 가스통을 가득 실은 트럭 한 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언덕을 오른다. 차가울수록 중심을 향해 더욱 뭉치는 가스의 입자들처럼 가슴으로 달겨드는 눈발들, 눈에 덮여 있던 그리움이 은빛 어린魚鱗처럼 화르르 일어난다.

 

 중심의 뜨거움으로 꽃대 하나 밀어 올린다.

 

 겨울 수선화

   


 

 

아이들의 그림자

    -지붕 위의 사람들

 

지붕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저 높은 지붕 위로 어떻게 올라갔을까?

지붕 서편으로부터 어둠이 몰려온다.

아이들의 그림자가 지붕 아래로 길게 꺾여 내린다.

구겨진 거대한 거인처럼 보인다.

낮 동안에 달아올랐던 지붕이 천천히 식는다.

아이들의 몸으로 재빨리 빨려드는 그림자들,

지붕 위에서 아이들이 쪼그려 잠이 든다.

어둠 속의 지붕이 뼈처럼 하얗다.

 

 

           * 정찬일 시집가시의 사회학다층현대시인선 162(다층, 2018)에서.

                                          * 사진 : 심해深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