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2월호의 시(2)

김창집 2018. 2. 6. 16:27



클로버 꽃 - 남대희

 

어제저녁 친정 간다고 나간 아내가

아침 산책길 잔디밭 모퉁이에 앉아있다

재주도 없는 내게 시집와서 행여나

꽃밭에라도 앉아 볼까 했을 텐데

평생을 잡풀 속에서 하얗게 늙었다

그래도 아들딸 낳고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나 장만했으니 행복이란다

내겐 둘도 없는 행운인데

   

 

 

덮는 - 성숙옥

 

눈이 편지를 쓴다

지금 이 순간 하염없이 내리는

저 점선의 행간을 따라가면

붉게 밑줄 친 그대가 있을까

내 속에서 사슬로 이어지는 생각이

그 사이를 꽃잎처럼 흩날린다

꽃핀 날만이 사랑이랴

매운바람으로 뒤엉키고 풀어지는

뒤안도 있다

꽃 진 마음이 덮인다

세상의 경계를 하얗게 지우면서

하지만 내가 덮는 그대는

자꾸만

눈밭에 붉은 찔레 열매로 솟아

거기

내 발자국 찍히겠다

   

 

 

이어도 사나 - 김혜천

 

1

천지는 개벽하고 수중분만하였다

서산따오에서 278 마라도에서 147

빙하기 그 때에는 걸어서 닿았다

자식은 부모 버려도

자식 버리는 부모는 없다

핏덩이 팽개치고 무슨 팔자 펴 보려고

내 자식 아니라 도장을 찍나

예기 예기 훗날 전설에 남을 할망아

뱃속 궤양 터지고 천공 뚫려도

끝내 지키리라 내 새끼

끝내 만나리라 내 막둥

 

2

영등신 널뛰면 허벅지 내미는 이어초

고향집 연기에서 이밥 냄새가 나네

그리움 쪽빛임을 내 이제 알았거늘

삶의 파고 높을 때는 배 한 척을 띄우리

파도가 뺨 때리고 머리채 휘어 감아도

족보에도 못 올린 널 찾아 헤맨다

파도 위에 떠 살다 널 찾는 그날

수중 낙원 그 뜨락에 고래화상 모셔놓고

물새보살 모셔 놓고 달빛 차회 열리라

유토피아 이어도 이어도 사나

유토피아 이어도 이어도 사나

   

 

 

풍경들 - 우정연

 

  맨발의 허기진 표정, 어슬렁거리며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수소들

 

  긴 숄을 왼쪽 어깨에서 머리로 다시 왼쪽 어깨까지 고정시킨

  여인들의 거북등 같은 발바닥

 

  청바지 정장에 허리춤까지 보자기를 두른 젊은 신세대들의 비싼 안경과 신발

 

  모닥모닥 앉아 불을 쬐는 무리의 아비와 어미와 아이들의 푸석한 손바닥

 

  가도 가도 끝없는 벌판, 으쓱 솟은 바나나나무 사이에 웅크리고 앉은

  늙거나 젊은 아랫도리들

   

 

 

겨울 단상(斷想) - 이범철

 

*엄습

 

올겨울 추위가 절정에 있다는데

절정은 어떤 것일까 싶어

얼음 위에 발바닥을 살짝 놓았다

, 발끝으로 차오르는 이것은,

뜨거운 눈물처럼 부드러운데,

지난밤의 얼음 위로, 다른 물이 천천히 천천히 올라오다가

빙수가 되고 얼음이 되어 하나가 되어가는 저것들

언젠가 당신이란 사람이 내 가슴에 차오를 때

정신없던 나의 마음도 그랬다

 

*절정

 

갈대꽃이 바람을 타는 줄 알았지만

마른 갈대가 추위에 온 몸을 떨고 있으리라 했지만

여울가 갈대꽃 수풀이 흔들렸던 건

풀섶 빽빽이 숨은 참새떼가 튀어 오르며

무엇인가 느꼈던 것이었네

무엇 때문이었겠는가

겨울의 찬 여울을 몸서리치게 한 것,

참새에게는 그 순간이 모두 이승의 절정이었다는 것인가

 

*생각, 생각

 

늦가을 심어놓은 마늘 밭

촉만 조금씩 내밀고 있다가

겨울이 들자 생각에 생각만 거듭한다

몸도 마음도 썩히지 못하고

무슨 궁리만 슬프도록 하는 줄 알았지만

결국 맹추위처럼 알싸해질 마늘,

한 번은 겨울을 견뎌봐야

그 맛 싸하게 몸에 박히는 것을 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겨울은 지금 마늘 농사 중이었던가

   

 

 

따로식구 - 홍해리

   -치매행致梅行 246

 

아내는 침대에서 밥을 받아먹고

나는 홀로 쓸쓸히 슬픈 식사를 한다

 

살아 있는 밥이어야 맛이 있지

맛없는 병든 밥은 밥도 아니다

 

고봉밥도 적던 시절이 있었거니

이제는 두어 술 깨죽깨죽거리니

 

이것도 식사를 하는 것인가 몰라

식구란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인데

 

묻노니, 따로따로 먹는

우리는 한 식구인가?

   

 

 

달항아리 - 박병대

 

너는 흙의 자식이다

허공을 끌어들여 더도 덜도 없는 어둠으로

드난살이 설움 가득한 순한 마음을 본다

달처럼 은은한 모습에 절로 평안하여

네 안에 내가 있노라 고백하노니

품고 있는 검은 달이 나인 줄 알아라

나도 흙의 자식이다

고요를 끌어들여 생명을 보듬고 허공이 되는

차지도 넘치지도 않는 빛바라기로 숨어서

어둠에 뜨는 밝은 달 바라보며

밝음에 뜰 수 없는 어둠으로 평안한

그믐 밤하늘에 뜨는 검은 달이다

 

너는 밝은 달 되어 어둠을 품고

나는 검은 달 되어 빛을 품는다

흙에서 태어나 흙냄새 풀풀 날리며

소박한 삶의 검푸른 빛으로 항시 떠 있는

밝은 달과 검은 달이 격렬한 고요를 풀어놓은

허공은 비릿하게 목마른 그리움이다

   

 

맹목의 땅 - 손한옥

 

  할머니 등은 아이의 꽃밭 해바라기 지천의 땅, 유치가 빠져 , 새나가는 아이의 얼굴은 꽃보다 환하다 오래 배워 온 경전을 덮은 할머니 한가로운 출구를 막고 그 등에 꽃을 심었다 주먹 내면 가위 낼게, 열두 번 속아도 그 등은 허물어지지 않는 땅 거름 짙다

 

  아이는 신데렐라 노래 부르고 스무 번도 더 한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 진진찰찰 또 보채는 아이엄마 오지 않는 밤 달은 어찌 그리 더디 넘는지 자정을 넘는 달빛 아래 자작자박 발소리 기다리는 밤 곱디고운 찔레꽃 하르르 져도 할머니는 꽃잎 한 장 못 밟는다 자작나무 어깨에 메고 돌아올 아이엄마 서늘한 노동이 멈출 때까지

 

  선녀를 잃고 바위에 앉은 나무꾼보다 슬픈 아이를 안은 할머니 이야기는 자꾸자꾸 길어지고 선녀가 내려준 두레박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나무꾼 이야기 들으며 비로소 안심한 아이는 졸린 눈을 감는다

 

  사분사분 꽃잎 쌓이는 할머니 등도 이제 고요고요하다.



                           *월간 <우리詩> 2월호(통권제356호)에서

                                     * 사진 : 얼음새꽃(복수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