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사랑은 피고 지는 일이라 생각했다’에서
♧ 네게로 스밈
눈보라의 발목 잡는 매화 향기로
몰래 다가가는 것
밥물을 맞추며
눈가에 스미는 것
코를 킁킁이는 식탁에서
등진 너의 귓가까지 스미는 소소한 느낌
사랑은
내 향기가 너에게 배어드는 것
너에게 내가 묻어나는 것
한 몸에 우리를 지니게 되는 것
자연스러워서 함께 있을 땐 모르는 것
사랑은 느리게
우리가 스미는 것
추억이 되어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응답
♧ 어디 있나요
봄이 왔다. 연분홍 옷이 좋아졌고 레이스 치마가 쇼핑카트에 채워졌다. 밝은 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볼터치와 아이새도우가 밝아졌다. 콧노래가 잦아졌고 몸이 음표로 가득 찼다. 나비와 꽃이 함께 있는 장면이 자주 눈에 들어왔고 시계와 달력과 수첩을 보는 횟수가 늘어났다. 피시식 웃는 시간과 거울 앞에 머무는 시간이 좋아졌다. 문자를 보내는 시간과 뜨거워진 전화기를 타고 오는 목소리가 볼을 부비는 시간을 불러왔고 초콜릿과 사탕을 파는 가게 앞에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달달한 커피를 아낌없이 마시는데도 시간이 늘 부족했다. 하루 종일 한 사람 속에서 주연놀이를 하는 상상과 연습으로 봄이 피어났다. 내가 꽃이 되고 나비가 되어도 한 사람이 있기에 가능한 봄이 왔다. 꿈에서 깨어났는데 나에게만 봄이왔다.
♧ 가까운 사이
당신의 집까지 뛰어가는데 시간을 재보고
버스가 타고 싶어졌다
당신의 집까지 수선화가 몇 송이 피었는지
조금은 느리게 골목마다 멈추고 싶어졌다
당신의 집까지 천둥은 몇 번 치는지
비를 맞고 싶어졌다
화재경보기를 몇 번 눌렀는지
당신의 얼굴을 몇 번 피했는지
몇 번 망설이다
돌아왔는지
고백은
참
거짓
참거짓
당신당신당신
온종일 매 머릿속의 초인종 소리
눈물샘과 다크서클
물웅덩이와 파인 아스팔트
매화가 피었고 유채가 피었고 목련이 피었고
당신이 왔다 눈이 멀고 귀가 먹먹하고 가슴이 아리고 잠이 없고 밥맛을 잃고
당신도 나를 사랑한다 아니다 당신은 내 것이다 아니다 당신도 아프다 안 된다
아프니아프네아프다 죽더라도보고싶다 죽더라도고백하자 죽어도못하겠다
아, 들킬까봐
당신의 이름도 못 부르는 봄
♧ 아침에 만난 당신이 저녁에 말했다
복숭아꽃 필 때 사람들은 제 발에 밟혔다
복숭아 가지 꽃송이로 부러질 때
복숭아가 익을 때까지 웃음이 번져 나무 주위가 야단이었다
복숭아꽃 지고 복숭아즙 마르니 잎마저 밟혔다
눈이 내려 복숭아 나뭇가지 눈송이로 휘어질 때
나무 주위엔 발자국 하나 나지 않았다
복숭아나무가 저 혼자 노래를 부르고서야
혼자 외던 독경이 화음을 이루었다
♧ 남쪽으로 봄이 온다하여
꽃 피는 소리 들릴까봐
천둥치는 밤 지나
꽃 핀 하루 지칠까봐
안개비 내리는 낮 지나
꽃 지는 그늘 아플까봐
연둣잎 하얀 꽃잎 사이에 놓아
봄이 온다 하고 가네요
버릇처럼 맴돌던 나무 곁에서
한바탕 땀 흘리며 꾸던 낮의 꿈처럼
꽃이 지나간 자리마다
짧은 인사로 다리를 놓아
봄이 온다 하고 사람이 지나가는 길
♧ 여전히 오고 있는 두근두근
당신만 믿으며 쓸데없이 살았으면
가슴속에 그리움만 새겨 넣었으면
얄팍한 사랑놀이만 해 보았으면
나비가 날고 새가 지나가는 사려니 숲길에 놓였으면
구름을 타고 이시돌 초원을 적시러 가는 이슬이 되었으면
당신의 운행노선을 꿰고 있는 하늘이 되었으면
따뜻한 봄날만 있는 나라에서 당신과 함께 살았으면
사춘기 소년과 소녀로 멈춘 채 살았으면
첫눈과 분홍 뺨이 유물이 되어 영원히 찾지 못하는 곳에 묻혀버렸으면
♧ 연둣빛 휘파람
죽어서도 기억을 가진 자가 과거의 맞춤법으로 오고 있는 날은 어제 내린 오늘의 비
추락해서 바닥을 헤엄치고 있는 천사는 무지개 너머의 수평선
빗물을 적시며 바다를 찾아가는 지느러미는 인어가 부르는 노래
초원을 상상하던 날들은 동물원 안에서 고래가 그린 배꼽
휘파람을 불며 춤을 추는 날엔 날개가 생기는 달력의 동그라미
*김병심 시집 『사랑은 피고 지는 일이라 생각했다』(도서출판 각, 2017)에서
*사진 : 산복숭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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