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4월호의 시

김창집 2018. 4. 6. 18:18


 주요 목차

 

*권두 에세이 | 유진

*신작시 25| 이생진 권순자 서량 김용화 나병춘 허정 박은우 장성호 오미옥 김영식

                이산 김완 이남섭 이철경 정동재 김혜숙 손성태 우정연 장유정 강명수 김정인

                박노식 나영애 조재형 정형무

*신작 소시집 | 방수영 *테마 소시집 | 김은옥

*연재시 | 홍해리 *추모 특집 | 고 이무원

*영시 번역 | 백정국 *신입회원 특집 | 이순향 백수인

*나의 시 한 편 & 시 에세이 | 유정자 문선정 최한나 전선용

*산문 | 임채우 *한시한담 | 조영임

   

 

 

시 쓰다가 잠들면 - 이생진

 

시 쓰다가 사르르 잠들면

그때 꿈에서 다른 시를 만난다

봄이 오고

꽃이 피고

나비가 날고

아주 이상적인 풍경이다

그 꽃밭에서

꽃 같은 여인이 꽃가루 바르고 내게로 온다

그 얼굴을 내 얼굴에 비빈다

아마 그 여인도 시를 쓰다가 온 모양이다

나는 그 여인을 놓칠세라 옷소매를 잡는다

놓치면 울 것 같은 그런 여인이

시에서 꿈으로 꿈에서 시로

그렇게 온 여인의 임자가 나라는 거

실감이 안돼

꿈을 긁어보고 꼬집어본다

절대로 모조가 아니다

아니 실물보다 더 실물이다

꿈과 시의 실리實利가 거기 있다

그 꿈에서 깨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내가 시밖에 모르듯 그녀는 나밖에 모른다

이대로 끝났으면 좋겠다

꿈에서 깨면 실망하니까

실망이 없는 꿈이면 좋겠다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이었으면'하며

그녀에게 매달리듯 꿈에 매달린다

꿈에는 육체가 없어

잡히는 그림자가 없다

하지만 꿈은 왕래가 쉽다

시와 꿈이 공존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래서 꿈이 좋다

그것을 생각하는 나와

그것을 생각하는 너의 꿈처럼 아름다워

나는 시를 쓰다가 네게로 가고

너는 내 시를 가지고 꽃밭으로 가고

꿈은 나비의 날개처럼 가볍다

그래도 꿈을 믿는다고 강한 어조로 말하다가

꿈은 깨고

시만 남는다

   

 

 

미스김라일락 - 김용화

 

미군정기 삼각산 바위틈에 자생하던

토종 수수꽃다리가

태평양 건너가 서양 물 먹고

파란 눈의 미스 김이 되어 돌아왔다

 

진보랏빛 꽃망울이

연보라를 띠다

활짝 피며 백옥같이 흰옷으로 갈아입고

짙디짙은 향기를 멀리까지 내뿜어

매력에 빠져들게 만드는

라일락 중 라일락,

 

키 작고 당돌한 우리 귀여운 아가씨

미스 김이 돌아와

까치발구두, 개미허리 드레스

폼 나게 걸치고

두 눈에 눈물 매달은 채

고혹적 자태를 한껏 발산하며 서 있다

   

 

 

흔들리지 말자 - 김완

 

새벽 출근길 자동차의 시동을 걸자

지진 발생 긴급재난 문자가 뜬다

20171115일 포항의 지진 이후

수십여 건의 여진이 발생하고 있다

 

몸의 중심이 흔들린다

한반도가 흔들리고

지구 전체가 흔들린다

지구별이 불안정해지고 있다

흔들릴수록 몸의 중심을 잡자

중심을 잃고 흔들릴수록

먹이를 보고 달려드는

하이에나들 가득한 세상이다

 

가짜가 웃고 거짓이 판치는 세상

명세서에 왜 이 항목이 들어갔는지

물어보자 질문을 두려워하지 말자

흔들리지 말자 흔들리지 말자

 

땅이 갈라지고 지구가 흔들려도

내일은 함께 흔들리지 말자

시름이 깊으면 사유도 자라는 것

흔들리지 말자 흔들리지 말자

   

 

 

아버지 생각 - 이남섭

 

가끔 토요일이면 아버지가 오셨다.

그때마다 어린 나를 냇가로 데리고 가

그물을 치며 피라미와 송사리를 잡았다.

 

내 나이 이순耳順에 아버지 돌아가셨건만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딱 그뿐이다.

고향 아버지 어머니 산소를 갈 때마다

 

얼마 남지 않은 내 인생을 생각한다.

아버지! 나 그곳에 묻히면

선천성 그리움도 함께 피어오르겠지요.

   

 

 

겨울, 금오산 비가(悲歌) - 손성태

 

산짐승 한 마리 제 목숨 내뱉는 기침소리 연신 들려온다

산사의 범종이 딸꾹질하며 오후 4시를 두들긴다

따라오며 악, 악쓰던 까마귀 한 마리가 주춤, 숨죽이는 해거름

바싹 마른 가지에 붙어있는 단풍잎이 노을에 붉게 떤다

나목 사이로 드러난 샛길은 백치의 덧니 같다

산길을 오르내리던 사람들 짐승들의 그림자는 소나무 그늘에 걸려있다

삭풍은 거침없이 잔솔가지를 흔들며 와서는 귓불에 발갛게 맴도는 검불을 후려친다

산의 내막이 환히 보이는 종소리가 어느 산짐승의 울음소리 같다

노을이 고단한 눈빛으로 와서는 나무 사이로 쳐둔 그물을 거둬 산 너머로 끌고 간다

어스름해지는 박명薄明의 시간, 산 아래 도시의 가로등이 서서히 켜지는 동짓날

어느 골짜기 숨죽이는 늙은 짐승의 흐느낌 바람에 밀려들리다 끊어지다 흩어진다

   

 

 

2- 강명수

 

  차창 밖 어둠이 열리고 있다. 흩어진 구름 사이로 새침데기 새댁처럼, 빼꼼히 얼굴을 내미는 석양이 길을 따라 달린다. 여러 겹의 능선을 선명하게 긋는다. 바람 한 점 물고 출렁이는 능선에 달걀 한 개를 굴리면 또르르 잘도 굴러 갈 것 같다. 고추장에 버무려진 국수구름이 화폭 가득 차오르면 봉우리에 날개 달아 노저어가며 물결이 이는 산. 모악산 갈래갈래 구불구불 휘어져가고, 또 한해가 담담하게 어스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노곤한 계절을 풀어놓는다. 능선마다 빛깔을 달리하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한 장 남은 달력에 길을 묻는다. 또 하나의 발을 놓는다.

   

 

 

당신과 나 - 나영애

 

천변 산책길

앙금 가라앉은 샛강 물

졸졸 흐른다

 

강물 내려다보는 갈대

갈대 올려다보는 강물

정답다

 

당신과 나, 우리 같다

 

푸른 시절,

오감 팔딱거리던 날들

꽃바람 불 땐

당신으로, 나 역시 출렁거렸지

천둥에 휘청하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여름 샛강 넘치고 빠지듯

우리에게도 가을이 왔네

마른 갈대처럼

육신이 바삭거리네

 

단 둘뿐인 저녁 식탁

서로에게 일기 쓰듯

오늘 하루를 풀어 놓네

나는 당신 편 되고

당신은 내 편 되어

상한 갈대를 토닥여 주네

 

만추의 계절이 되어서야

갈대꽃처럼 서로에게

만만하고도 포근하네

 

샛강가 갈대 한 쌍

오늘도 살랑살랑 거닐고 있네

   

 

 

병실 풍경 - 홍해리

    -치매행致梅行 273

 

간병인 네댓이 모여 말꽃을 피운다

 

환자를 돌보는 일이 지겨워 죽겠다나

어느 병원은 이렇다나 저렇다나

 

환자야 아프다고 낑낑대든 말든

병실이야 떠나가든 말든

 

그렇거나 말거나

떠들 만큼 떠들었으니

 

나는 잔다, 고로, 나는 간병인이다.

 

 

                       *월간 우리시’ 20184월호(통권제358)에서

                               *사진 : 요즘 한창인 제주아그배나무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