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산림문학 초대시 '나기철 시인'

김창집 2018. 6. 27. 22:03



들판의 동백꽃

 

  오름 오르기 위해 가는, 바람 차고 추운, 사람들 별 다니지 않는 들판, 꽃들 붉게 피우며 거기 동백나무 하나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나무 아래 머물다 거기서 얼마 되지 않는 한 오름을 올랐습니다. 오름은 마른 줄기 가로막고 가팔랐습니다. 친구와 나는 일행과 떨어져, 오르다 오르다 힘겨워, 내려가 동백나무를 표지로 그 옆에 누워 있기로 했습니다. 한참 후 오름 다 오른 일행들 내려와 우리 곁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곳 달리 동백나무 일정한 주위에는 희한하게 바람하나 없는데 가만히 보니 동백꽃 붉은 빛깔들, 그 힘으로 바람을 멀리멀리 보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거기 있는 마른 억새랑 들풀이랑 우리들 모두 따스하게 녹여주며.

  얼마 후 우리는 거길 떠났지만 그 동백나무 오래오래 그 곳서 그 부근 고요하게 해줄 것 같았습니다. 따스하게 해줄 것 같았습니다.

 

 

여름 한라산

 

1

오월 안개 걷히고

이제 한라산은 여름 채비 한창이다

늘푸른나무지대에서

고산식물대까지

 

적도 부근에서 밀려온

난류가 더 뜨거운 만남을

기다리는 곳

 

젊은 어머니의 산이여

 

가마솥 같은 산정

부드러운 어깨

넉넉한 품

수많은 나무와 꽃과 새들을

안아 먹인다

 

허나 그 안 가파른 계곡도 있다

그 밑 어딘가 바윗돌 녹아 뜨겁게 흐르고 있다

 

2

동서남북 어디서 보아도

그만큼의 모습

 

보는 이로 하여

그를 닮게 하고

또 닮게 한다

 

그대가 만드는 교향악이

우리를 안절부절 못하게 한다

 

3

그대는 아무도 없는 들판의

푸른 바람

새 소리

양털구름

또 지평선 위의 달

막힌 방 안의 환풍기

프로펠라 비행기의

관제탑

 

지평선이 마을을 그리워하듯

침묵하는 우리에게

더 큰 침묵 알게 하신다

 

빈 들판에 홀연

먹장구름 몰려와

두려워 떨 때

그때 에메랄드 목소리

 

그대는 이런 유월의

푸르름이다

 

그 푸르름 우리에게 와

마음의 연못에 비칠 때

 

알 수 없는

기쁨이 된다

평화가 된다

사랑이 된다

 

그대는

여명의 손짓

먼 바다의 해조음

 

그런 그리움이다

햇살이다

   

 

 

동문시장

 

제주 동문시장 전등들은

대낮에도 훤히 빛난다

 

제주은행 본점 옆

들어서면

생선 파는 아줌마들

갓 들어온

조기 옥돔 우럭 고등어 오징어 문어

갈치 새우 동태

좌판 벌여 놓고

 

머리 위

오징어 배 불빛 같이

100W 전등 하나씩 수백 개

나란히 밝혀 놓고

 

이 세상

가장 이쁜 모습으로

앉아 있다

 

동문시장에 들어서면

아버지 냄새

어머니 냄새

누이 냄새

친구 냄새

이웃집 아저씨 냄새

 

풀 냄새

꽃 냄새

밥 냄새

찌개 냄새

옷 냄새

돈 냄새

 

미륵 세상 냄새

하늘 냄새

 

세상 일 마음 훔칠 때면

동문시장에 가면 된다

 

몸 부딪치며

아줌마 얼굴과

등불들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도

동문시장이 된다

등불이 된다

   

 

 

빙떡, 고구마

 

제주 섬에도

아직 오지가 있어

아라에서 봉개 가는

월평 길가에

집 한 채 서 있어

찾아가니 내 놓는

주인 여자의 빙떡과 고구마

제주에서는 아직도

오지가 있어

관광객 닿지 않는 곳

빙떡 같은 부부가 있어

빙떡과 고구마 되어

살고 싶어 거기

   

 

 

그렇게 그렇게


저 김녕 바다

남실대는 물결같이


게우젓

푹 삭아

밥에 스며들듯이

그렇게


저 몸 부비는

쑥대나무 가지들같이


찌익찌익

새 소리

아침 울리듯이



    


녹나무

 

연둣빛 바람

누렇게

지는 이파리

하나

 

다시

바람 분다

 

저 너머

어제와 다른

구름

     

 

겨울 비자림에서 

 

하늘 향해

고갤 쳐들고 있는

오래된 비자나무 바라보면

, , ,

바람 견디는

팽팽한 활줄

유리 깨지듯 우는

새소리 푸르름이

찰찰 넘친다

그래, 이 나무들

천 년 만 년

살 것 같다

비자나무 숲에 와

고갤 쳐들고 있는

오래된 비자나무 바라보면

나도 천 년 만 년

죽지 않고 살 것 같다

   

 

 

푸른

 

몇 년 동안이나 힘써 넘으려 했던

저 푸른

이제는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겠습니다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겠습니다

로 넘지 못하더라도

그 너머 아름다운 들판 있다 해도

무쇠비 오더라도

넘으려 허우적거리지 않겠습니다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