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판의 동백꽃
오름 오르기 위해 가는, 바람 차고 추운, 사람들 별 다니지 않는 들판, 꽃들 붉게 피우며 거기 동백나무 하나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나무 아래 머물다 거기서 얼마 되지 않는 한 오름을 올랐습니다. 오름은 마른 줄기 가로막고 가팔랐습니다. 친구와 나는 일행과 떨어져, 오르다 오르다 힘겨워, 내려가 동백나무를 표지로 그 옆에 누워 있기로 했습니다. 한참 후 오름 다 오른 일행들 내려와 우리 곁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곳 달리 동백나무 일정한 주위에는 희한하게 바람하나 없는데 가만히 보니 동백꽃 붉은 빛깔들, 그 힘으로 바람을 멀리멀리 보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거기 있는 마른 억새랑 들풀이랑 우리들 모두 따스하게 녹여주며.
얼마 후 우리는 거길 떠났지만 그 동백나무 오래오래 그 곳서 그 부근 고요하게 해줄 것 같았습니다. 따스하게 해줄 것 같았습니다.
♧ 여름 한라산
1
오월 안개 걷히고
이제 한라산은 여름 채비 한창이다
늘푸른나무지대에서
고산식물대까지
적도 부근에서 밀려온
난류가 더 뜨거운 만남을
기다리는 곳
젊은 어머니의 산이여
가마솥 같은 산정
부드러운 어깨
넉넉한 품
수많은 나무와 꽃과 새들을
안아 먹인다
허나 그 안 가파른 계곡도 있다
그 밑 어딘가 바윗돌 녹아 뜨겁게 흐르고 있다
2
동서남북 어디서 보아도
그만큼의 모습
보는 이로 하여
그를 닮게 하고
또 닮게 한다
그대가 만드는 교향악이
우리를 안절부절 못하게 한다
3
그대는 아무도 없는 들판의
푸른 바람
새 소리
양털구름
또 지평선 위의 달
막힌 방 안의 환풍기
프로펠라 비행기의
관제탑
지평선이 마을을 그리워하듯
침묵하는 우리에게
더 큰 침묵 알게 하신다
빈 들판에 홀연
먹장구름 몰려와
두려워 떨 때
그때 에메랄드 목소리
그대는 이런 유월의
푸르름이다
그 푸르름 우리에게 와
마음의 연못에 비칠 때
알 수 없는
기쁨이 된다
평화가 된다
사랑이 된다
그대는
여명의 손짓
먼 바다의 해조음
그런 그리움이다
햇살이다
♧ 동문시장
제주 동문시장 전등들은
대낮에도 훤히 빛난다
제주은행 본점 옆
들어서면
생선 파는 아줌마들
갓 들어온
조기 옥돔 우럭 고등어 오징어 문어
갈치 새우 동태
좌판 벌여 놓고
머리 위
오징어 배 불빛 같이
100W 전등 하나씩 수백 개
나란히 밝혀 놓고
이 세상
가장 이쁜 모습으로
앉아 있다
동문시장에 들어서면
아버지 냄새
어머니 냄새
누이 냄새
친구 냄새
이웃집 아저씨 냄새
풀 냄새
꽃 냄새
밥 냄새
찌개 냄새
옷 냄새
돈 냄새
미륵 세상 냄새
하늘 냄새
세상 일 마음 훔칠 때면
동문시장에 가면 된다
몸 부딪치며
아줌마 얼굴과
등불들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도
동문시장이 된다
등불이 된다
♧ 빙떡, 고구마
제주 섬에도
아직 오지가 있어
아라에서 봉개 가는
월평 길가에
집 한 채 서 있어
찾아가니 내 놓는
주인 여자의 빙떡과 고구마
제주에서는 아직도
오지가 있어
관광객 닿지 않는 곳
빙떡 같은 부부가 있어
빙떡과 고구마 되어
살고 싶어 거기
♧ 그렇게 그렇게
저 김녕 바다
남실대는 물결같이
게우젓
푹 삭아
밥에 스며들듯이
그렇게
저 몸 부비는
쑥대나무 가지들같이
찌익찌익
새 소리
아침 울리듯이
♧ 녹나무
연둣빛 바람
누렇게
지는 이파리
하나
다시
바람 분다
저 너머
어제와 다른
구름
♧ 겨울 비자림에서
하늘 향해
고갤 쳐들고 있는
오래된 비자나무 바라보면
씽, 씽, 씽,
바람 견디는
팽팽한 활줄
유리 깨지듯 우는
새소리 푸르름이
찰찰 넘친다
그래, 이 나무들
천 년 만 년
살 것 같다
비자나무 숲에 와
고갤 쳐들고 있는
오래된 비자나무 바라보면
나도 천 년 만 년
죽지 않고 살 것 같다
♧ 푸른 山
몇 년 동안이나 힘써 넘으려 했던
저 푸른 山
이제는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겠습니다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겠습니다
罪로 넘지 못하더라도
그 너머 아름다운 들판 있다 해도
무쇠비 오더라도
넘으려 허우적거리지 않겠습니다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겠습니다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詩' 7월호의 시와 자귀나무 (0) | 2018.07.09 |
---|---|
'우리詩' 7월호의 시와 능소화 (0) | 2018.06.30 |
소화 고은영의 시 '6월'과 '숲' (0) | 2018.06.16 |
나기철 시집 '지금도 낭낭히' 2 (0) | 2018.06.10 |
'우리詩' 6월호의 시와 병꽃 (0) | 2018.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