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덕사 배흘림기둥 - 나병춘
어디서
천년 바람소리
범종소리 울리는가
가만히 귀 기울여보니
둥두렷 떠오른 저 옹이들
학춤을
추썩추썩거리며
날아오를 듯 숨죽이며
살아서 천년을 견뎌
죽어서도 천년이라
뉘라서
배흘림기둥을
잘났다 못났다 하랴
세계일화世界一花, 지극한 꽃송이
오호라
양 날개 펼쳐
만세토록 웅비하리
♧ 유리잔을 마주하다 - 이송희
당신은 늘 불안한
당신을 감싼다
잘 지내고 있나요
안부가 출렁인 순간
어느새 금이 간다
믿음이 벌어지듯
고요가 깨진 자리에 쏟아진 목소리
복받친 말들이 아주 잠시 반짝였다
오래된 기억들이 툭,
부서져 버린 시간
적막한 이 순간을 참을 수 없었을까
내지른 소리들이 손끝에 박힌다
노래가 그치는 순간
음악들이 멎는다
♧ 노란 편지지
어느 곳이든 서로 마음의
징을 울리고 과녁 안으로
활의 초점이 파르르 떨 때
사랑이라 느꼈다
점점 차고 경직된 낡은 시간
노을 진 길목은 노랗게 질려
아둔한 기억을 더듬어
서로 다른 위치라도
곧 한순간 소실점 안에
정확하게 맞닿았던 연분
낙엽을 가득 쓸어 담고
땔감 쓸 일이라 고집한
폐지 손수레가 잠시 허리를 편다
은행나무 길 나부끼는 안골로*에
그 작고 작은 도로 안은
잎사귀 가득 쌓인 낱말들
누가 써놓고 갔다
임자! 거기서 잘 자!
---
*구리시에 있는 도로
♧ 뜨거운 숨결 불어대더니 - 우정연
엄동설한에
배롱나무 가지에 까치밥이
매달렸다는 소문이 나자
도량은 관광지처럼 북적댔다
멀그스름한 홍시가
눈 털모자를 쓰고 기다려
한달음에 달려가 보니
모자는 간곳없고
붉은 연등만 주렁주렁하다
첫새벽부터 보살들이
하 하 호 호 후 후
뜨거운 숨결 불어대더니
내 그럴 줄 알았다.
♧ 살아 있으니까 - 나영애
내가 나 몰라 한계를 넘어섰던 거다
당신은 내 눈 앞의 세상을 빙빙 돌려
공포로 나의 움직임 죄다 묶었다
눈뜰 수 없어 숟가락 놓고 싶었지만
실눈 떠 하늘 우러러 밝음 훔쳐볼 때
무덤에서 한 줄기 빛을 보는 것 같았다
어두운 생각 접게 되고
나를 돌볼 수 있는 허락받게 되었다
노년의 삶 맛보게 한 당신을 곧 벗어나
활기차게 살게 될 거라 기대 했다
성급한 바람이었을까
서너 달 지났어도
여전히 비틀거린다
마음 다시 부여잡고
살살 달래어 함께 산책하며
오가는 사람 쳐다보든 말든
매일 두 번씩 도리도리 한다
약 먹고 운동하는 정성에
떠나 가 주면 좋겠지만
떠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오늘도
어스름이 내리기 전
즐겁게 산책 다녀와야 하겠다
전정기능 이상*
내가 내 몸 몰라 과로하여
기능을 망친 건 나,
가을을 감상하며 살아있으니까
---
*귀의 질병 하나로 공포스럽게 어지러움.
♧ 일회용품 - 전선용
일회용품을 보면 계약직 노동자를 보는 것 같다
이미 갈라놓은 나무젓가락이 운명선을 가진 것처럼
계약직 노동자도 비커 눈금 마냥 정해진 운명을 계량한다
더도 덜도 아닌 계량된 눈금만큼이 밥줄
저울에 정확하게 단 돈벌이 앞에 달다 쓰다
항변 못 하는 긍정이 개처럼 낑낑댄다
몇 번이란 제한적 숫자에 담보 잡힌 생명선
고개를 가로저어 본 적……, 아슴푸레하다
남이 ‘예’라고 하면 나도 ‘예’로 대답한다
아래위로 끄덕이는 머리는 무저항 동의
복종은 좀 더 나은 삶과 연동되는 백지수표일지도 모른다
자판기 종이컵이 입을 벌리고 뜨거운 커피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화상을 입더라도 견뎌야 다음 일 년이 보장되는 계약직
전세에서 월세로 옮기면서 비굴한 날인을 했다
하늘도 허기져 우중충한 날
중식으로 짜장면을 시켰다
나무젓가락에 스티로폼 그릇,
온통 일회용이다
노란 단무지도 일회용이 아닌가, 유심히 본다
서글픈 밥상은 청춘들에도 전이 되었다
척추가 무너진 나무젓가락과 오물 같은 잔반
역할을 다한 한 번은 비닐봉지에 묻힌다
퉁퉁 불어터진 면을 먹는데,
나무젓가락 같은 김 씨가 보이지 않는다.
♧ 메모리 칩 - 김혜경
나는 웬만한 건 다 안다
원하지 않아도 그들은 온갖 지식과 정보와 루머까지 쏟아 붓는다
나는 물이 고였다 흘러가는 웅덩이와 같다
부유물들이 서로 부딪치고 가라앉거나 다시 떠오른다
그들은 더럽고 깨끗함에 관계없이
원하는 대로 두레박을 담가 퍼갈 뿐이다
나는 세상이 정화되거나 오염됨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일이다
세상이 비좁아지는 만큼
모든 것은 납작해져야한다
수많은 정보는 압착기로 눌린 것처럼 작지만
나는 순식간에 부풀리기도 한다
머지않아 나는 부러진 연필심만큼 작아져
그들의 머릿속에 심길지도 모른다
그들은 더 이상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읽지 않아도 되고
경전을 외지 않아도 된다
모르겠다
볍씨만한 하트모양으로 변형되어
그들의 가슴속에 심길지도
나로 인해 그들은 신이 될 수도 노예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
♧ 구성리 바닷가에서 - 박상희
가을 바다에 왔네
멀리 떠나보낸
그대를 보네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오랜만이라
집에 두고 왔네
그대의 살 냄새가
바다에 가득하네
바둥거리는 물고기처럼
싱싱하게 비리네
가벼운 키스에도 휘청거리네
나의 옷자락이
그대의 온기를 휘감고 도네
그대와 더 걷고 싶지만
절망과 환희 가득한
먼 곳의 바람이 부네
나를 부르네
목구멍이 갈라지며 날 부르는 것 같아
나, 가봐야 겠네
그대라는 공허, 광막한
바람 부는 곳으로
* 월간 '우리시詩' 2018년 12월호(통권 제366호)에서
* 사진 : 제주의 겨울을 장식하는 붉은 열매들 1. 참식나무 2. 피라칸타 3. 먼나무
4. 아왜나무 5. 죽절초 6. 식나무 7. 호랑가시나무 8. 자금우 9. 백량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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