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숲의 모든 길은 세상을 향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나무와 풀을 좋아한 나는 오래전부터 작고 작은 숲 하나 낳아 길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 숲이 오히려 나를 기르기 시작했다. 숲은 나에게 때로는 어머니, 스승, 친구, 애인, 자식이 되어주기도 하고 나아 세계를 환히 비추어주기도 한다.
사랑만으로 세계를 통일한 숲이 나에게 걸어온 말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를 향한 끝없는 사랑의 고백이며, 지구 구석구석에 평화를 간구하는 기도다. 숲은 날로 자신의 몸이 파괴되고 지구 환경에 피폐해지는 현실을 탄식하고 걱정한다. 숲의 모든 길은 세상을 향하고 있다.
숲은 상처받은 세계를, 모든 생명을 끌어안아주고 싶어 항상 두 팔을 활짝 열고 있다.
숲의 눈빛 마음 말은 내게로 와 시가 되었다.
♧ 숲 거울
숲에 들면
내가 보인다
앞만 보이지 않고 뒤도 보인다
현실만 보이지 않고 과거도 미래도 보인다
현상만 보이지 않고 숨은 것도 보인다
죽은 목숨들의 영혼도 보인다
바위, 흙, 하늘, 구름, 바람, 계곡물의
마음도 보인다
세상을 등지려고 숲 거울에 든 그 사람은
자신을 에워싼 수백 송이 달맞이꽃이
밤새워 꽃문을 여는 것을 보고
세상으로 돌아갔다
어떤 사람은 숲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앞은 약한 짐승을 쫒는 맹수이고
뒤는 벼락 맞은 나무인 것을 보고
아예 숲 거울에 자리를 펴고 도인이 되었다
나는 숲 거울에서 지금 무엇을 보는가
앞은 더덕이고 뒤는 나비인 나
뿌리와 날개가 대지와 하늘이 맞서
안개가 낀다
♧ 숲에서 숲으로 초원에서 초원으로
천년 숲속을 걷고 걸으니
나는 천년 나무
광활한 초원을 바라보고 바라보니
나는 광활한 초원
숲과 초원이 기르는 아름다운
사람, 마을, 도시
사람이 가꾸는 아름다운
숲, 초원, 꽃밭
생명과 생명이 사랑으로 껴안는 곳
맑고 깨끗한 하늘과 땅이 눈 뜨는 곳
사람이 꽃이고 꽃이 사람인 곳
숲, 초원, 꽃의 나라
숲과 사람과 초원에
고이고 고이는 평화와 꿈
흐르고 흐르는 생명의 강
♧ 우는 들, 우는 숲
들이 울고 있구나
숲이 울고 있구나
있다가 떠나버린 사람
왔다가 가버린 사람
꽃들만 남아
피고 있구나 지고 있구나
들과 숲의 노래
누가 들을까?
꽃들의 춤
누가 볼까?
들과 숲의 말
누가 전할까?
들이 울고 있구나
숲이 울고 있구나
♧ 에미 은행나무의 자부심
새끼들을 지키기 위하여
무슨 짓을 못하랴
만개의 푸른 입으로
세상 먼지 다 삼켜
섬세한 천연 필터 폐로 걸러
맑고 신선한 공기 뿜어낸 허공에
새끼마다 몸에 꼭 맞는 집을 지어주고
그 집을 독으로 에워싸
어떤 짐승도 벌레도
내 새끼들을 넘보지 못한다
내 새끼들은
청정하고 평화로운 집에서
한 점 얼룩 없는
맑고 고운 초록 눈 뜨고
천년 미래를 꿈꾼다
알 수 없어라
기진맥진하다가도
자식들만 보면
푸릇푸릇 솟구치는 내 핏줄
♧ 겨울 억새
이승에 열린 귀 못 막아
이승에 뜨인 눈 못 감아
눈이 발목을 덮고
칼바람이 온몸을 흔들어
쓰러질 듯 꺾일 듯 휘청거리다가도
이내 허리 바로 세우고
나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당신
나를 품어 안는 당신
못 잊어 못 잊어 죽어서도 못 떠나
내 겨울과 싸우며
내 겨울을 밀어내며
한사코 나에게 봄을 주는 당신
어머니!
당신 있어
이 겨울에도
나는 꽃입니다
♧ 단풍 든 목숨의 빛
가을빛을 품은 들녘이
말없이 단풍 들어 곱다
늙고 볼품없는 나도
단풍 들었는가
들녘이 새끼들을 떠나보내고
고요히 단풍 들어 반짝인다
나도 자식들을 보내고
단풍 들었는가
단풍 든 목숨의 빛이
찬란하고 아프다
♧ 마늘
모두가 떠난 겨울 밭을
지키고 있는 님이여
눈이 쌓이고
찬바람 몰아치며
꽁꽁 언 땅에
뿌리를 내리고 싹터
당당하게 겨울을 건너는 님이여
당신이 경이롭고 눈물납니다
나도 당신처럼
내게 닥친 두렵고 떨리는
겨울을 이기고
다시 봄날에 푸르른 잎을 흔들며
맵고 알찬 육 쪽 새끼들을 다시
거느리고 싶습니다
자랑하고 싶습니다
노래하고 싶습니다
아 아 해마다 봄날에게 당신에게
입 맞추고 싶습니다
님이여
*『산림문학』2018년 겨울호(통권제32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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