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너무 애쓰지 마라
눈물을 이길 수 없다
이길 수 없다면
그냥 견디는 것이다
밤의 문장을 건너
아침이 온다
2019년 6월
김진숙
♧ 겸손이라는 손
꽃이 뭔지
바람이 뭔지
예까지 나를 끌고 온
공갈빵 같은 시만 쓰다가
노을 앞에 마주서면
불현듯 혼자된 손이
주머니 속에 숨는다
타인의 더딘 손목을 잡아준 적 없었고
먹장구름 짙은 살결을 어루만져준 적 없었고
결단코 오래 참은 적 없는 나의 불온한 손이여
손과 손 마주 잡아야 기도는 완성되나
왼손이 어제 한 일을 오른손이 반성해야
냉정을 견딜 수 있나
무너지는 저물녘
♧ 산란기
정직한 시가 못된 건
나 혼자뿐이더군
시를 낳고
연애를 낳고
꽃도
바람도
치열하게
맹꽁이
저 화끈한 사랑
슬어놓은
장맛비
♧ 눈물이라는 장르
봄 오는 길목에 이따금 갇히곤 한다
두부 같은 날들이 책상 위에 물렁하다 다 식은 커피 잔 읽지 못한 시집까지 쌓아둔 구름 조각들 두서없이 축축하고 수도꼭지 잠그는 걸 금세 또 잊었는지 행운을 꿀꺽, 삼켜버린 부엉이가 한눈팔지도 않고 무슨 주문을 외우는지 거실 밖 이월 바람이 자꾸 창을 두드려 꽁꽁 얼려두었던 내 안의 세포들은 옛집 슬레이트 처마 끝에 매달려 싱겁고 싱거워진 계절을 훌쩍이다가 사진 속 넉넉한 아버지가 두 스푼 된장을 풀어 끓여낸 아침의 시를 맛있다, 연신 드시는 목소리를 듣곤 해
첫 음을 항상 놓치는
눈물이 참 싱겁다
♧ 푸른 모과
열여덟 꽃의 힘으로
열매가 되기까지
바람에 불쑥, 떨어져 멍든 시간
단단히 마음 붙들고
살아보라 하신다
♧ 섭지코지
1.
밤하늘 훔쳐보다
입 안에 침이 고였다
한 입 크게 베어 물던 ‘보름달’ 카스테라
초가을 덜컥 받아든
그것도
팔월
보름
2.
피 묻은 칼을 물고
투신하는 풀벌레에게
배 한 척 띄우지 못한
벼랑 끝 파도에게
부재중
문자메시지
‘혼자라도 괜찮아’
♧ 아코디언 상상
길 위에 악기가 되리
내 심장은 아직 뛴다
혼자 걸어가기엔 햇살이 너무 좋아
찔레꽃 낮게 핀 언덕
지붕 없는 집엘 갔지
동백꽃 무덤 지나 보리밭 푸른 건반
무릎께 풀잎 소리 아삭거리는 바람 소리
오월은 세상을 향해 저렇듯 노래하지
바다가 반쯤 내걸린 들녘의 내 아버지
오래된 그 집에 누워
하늘 한 번
바다 한 번
둥글게 가슴을 여는
아코디언 한 소절
성산포 고향 바다 당겼다가 풀었다가
삼나무 가지 끝
휘파람새 흥 돋우는
트로트 아버지의 집은 유랑극단
오, 봄날
♧ 엉또폭포
오래도록 참았네
멈추어 선 저 울음
말을 아끼던 어머니
타들어간 속내인 양
흐리고 쓰린 날에도
쏟아내지 못하네
무심히 동백 지는
절벽에 기대어서
엉엉 또 울어야
펑펑 다 쏟아내야
그 겨울 견딜 것 같은
막내딸을 보았네
♧ 푸른 상영관
물고기가 운다는 그런 설정은
진부하다
영자포자 수조관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켜켜이 유리에 맺힌 눈망울을 관람한다
윙크 한 번 날린 적 없고
눈감을 수 없으니
그토록 슬픈 눈을 나는 본 적이 없다고
무심코 읽어 내려간 자막은
분명 오류다
벵에돔 돌돔 우럭, 다금바리 대역까지
한번 문 낚싯바늘을 끝끝내 놓지 않아
늦저녁 초장에 찍은 대사들은
치열하다
뜯겨져 너덜너덜해진 우리 삶의 지느러미
함부로 놓지 못하는 오늘처럼 내일처럼
아파트 뒷골목에서
사람들은 숨을 쉰다
* 김진숙 시집 『눈물이 참 싱겁다』 (문학의전당 시인선 0307, 201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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