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지간
당신이 돌아오듯 시월은 돌아와서
어느 절집 49재
꽃향유나 피우다가
이승 끝 올린 뒷돈도 본숭만숭 그러네
당신이 떠나가듯
시월은 떠나가서
베갯머리송사같이 자늑자늑 빗소리
천지간 날 세워놓고 본숭만숭 그러네
♧ 해녀의 섬, 우도
기껏 우도의 밤은
쐬주 한 병
세워놓고
갈치가 갈치 꼬리 뜯듯
집어등이 집어등 뜯듯
신새벽 상처 난 바다
순비기꽃 피운다
여름과 가을 사이
일출봉과 우도봉 사이
여기가 어디라고 저 미친 고추잠자리
허공에 섬자락 끌고 태왁처럼 떠서 돈다
썰물에 남은 이름 밀물에 붕붕 뜬다
사랑이란 세상에 있을 때나 하는 거다
내 가슴 빨간 우체통
숨비소리 터지겠다
♧ 으아리꽃
푸르다 두르다 못해
살짝 한 풀 꺾인 들녘
이때다 이때다 싶어
숨죽이던 것들이
일시에 벌촛길 따라
떠도는
저 밀잠자리 떼
♧ 그래봤자
그래봤자 장끼도 한 철
고사리장마도 한 철
길 없는 쳇망오름 날아든 박쥐나무
매조록
철없이 내민
꽃술머리 너도 한 철
♧ 쓸데없이
쓸데없이
하, 쓸데없이
봄볕에나 겨워서
녹슨 양철문이
삐걱이는 수산리
왕벚꽃
혼자 타는 걸
쓸데없이 바라보네
♧ 본전
모처럼 세상에 와 혼자만 다 털렸다고?
복채 따라 펄럭이는
오일장 보살집처럼
인생은 벌어도 본전
밑져봐야 그도 본전
♧ 선흘리 먼물깍
그나저나 동백동산 그 너먼 가지 마라
4 · 3땅 곶자왈 길 물허벅 넘던 그 길
아직도
출렁거리는
내 등짝의 먼물깍
♧ 어떤 연애질
근데, 근데 말야
이건 정말 비밀이거든
제주성 밖 양 귀퉁이
동미륵과 서미륵
천년의 눈빛 그대로 연애질 하는 거라
한눈 한 번 팔지 않는 그런 생도 있으랴
그러거나 말거나 저렇게 마주 서서
소원을 듣는 일조차
건성건성 하는 거라
그런 거라
세상에 우린 외로워서 온 거라
어느 봄밤 북두칠성 본을 뜬 칠성통 길
밤마다 반보기 하듯
돌아들곤 하는 거라
* 오승철 시집 ''오키나와의 화살표''(황금알 시인선 194, 201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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