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의 기도 - 정온유
-부활절에
내 몸이 한 번 뒤척일 때마다
생각이 뒤척이고 마음이 뒤척이고 세상이 뒤척입니다.
어수선한 마음들이 정리 되는 시간,
핏값으로 물든 내 삶을
보듬으며 새벽을 걷습니다.
예배당 오르는 계단엔
부활의 아침을 찬양하는 작은 꽃들이
봄빛을 털어내며 온몸으로 기도합니다.
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내 과거와 미래가 함께 움직이고
이 모든 것을 끌어안고 내 영혼이 움직입니다.
당신께 가까이 가기 위해 온몸으로 뒤척입니다.
내가―.
♧ 비 냄새를 만지는 일
새벽,
찬비가 내립니다
나는 오래도록 창가에 서서
그대를 생각합니다.
창밖으로 손을 내밀면
빗물은 차갑게 내려앉고
우주를 닮은 둥근 생각들이
몽글몽글 고입니다.
차가운 뿌리들이 내 몸 속으로 길을 내고
나는 세상이 들려주는 소리에
생각을 맡기고
마음은 딴 데 가 있습니다.
비 냄새를 만지는 일은,
당신의 마음을 만지는 일,
뭉근한 그리움을 더듬어 보는 일입니다.
♧ 길
길을 떠나도 길이 내게 다시 옵니다.
길은 말이 없습니다.
다만 보여 줄 뿐입니다.
길은 언제나 길에서 만나 길로 흐르기에
길을 잃어도 무섭거나 두렵지 않습니다.
길이 길을 만들어 갑니다.
길은 내 안으로 들어와 당신에게로 흐르고
다시 길 속으로 이어집니다.
나는 길 위에 있고 길은 내 위에 있습니다.
내 안에서 뿌리를 내리며 고요한 길을 만들어 갑니다.
단단하고 견고한 길은 내 몸 속으로 심어져
마음과 생각과 시간 속으로 길을 냅니다.
당신이 나를 만들어 갑니다.
♧ 먼 길
당신의 마음속을 걷다 보면
외롭지만 두렵지 않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길은 더 넓어지고
당신의 숨소리는 가까이에서
들리기 때문입니다.
나는 정성스럽게 당신을 걸어갑니다.
당신을 걷다보면
순례자의 마음처럼
선잠 끝에 오는 아련함이
노을처럼 번집니다.
외롭지만 두렵지 않은,
내가 당신을 걷는 이유입니다
길게 늘인 내 그림자가
당신께 흐르고 당신은 다시 내게 흘러와
나를 감싸고 돕니다.
오늘도 나는 당신의 마음길을 걷습니다.
♧ 언어의 몸집
밤새
잠과 생각이 서로 얽혀 뒤척였다.
정신은 잠과 생각 사이를 오가느라 얕았다.
새벽이 되어서야 생각의 정체를 붙잡았다.
그러니 정신이 깊어졌다.
깊은 내 속을 고요히 들여다보고 나서야
얽혔던 잠과 생각이 가지런해졌다.
덕분에 맑은 하루를 보냈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깊고 깊은 내 속으로 들어가 보면
언어의 몸집들이 보인다.
불편하게 부풀린 언어들을 다독이고 이해하고 나면
어느새 언어는 단단하고 야무져 있다.
결국 언어를 단단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다독이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을 이해하고 긍정하게 될 때
생각의 언어는 저절로 단단해지고
정신은 평온해진다.
♧ 길에 대한 단상
십년 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에게 가는 길
다 가서 헤매어 다른 길로 들어섰다.
플라타너스 터널로 쭉-뻗은 한 여름,
굵직한 햇살들이 이파리에 매달려
폭죽처럼 터지던 여름 햇살.
목적지를 못 찾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친구 생각은 잊고
한 동안 그 길에 머무르며
나도 같이 길이 되어
무르익은 햇살을 온몸으로 받았다.
애당초 길이란 정해진 것도 아니고
길은 길로 다시 만나고 이어지니
잘 못 든 길이라고 돌아설 일 아니다.
생애의 길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
내 삶에 길을 만들어 가는 동안
사계절이 바뀌고 나 또한 바뀌고
실수와 실패와 속에서
나를 더 단단하게 키우며
나만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날 시나브로
선물 같은 햇살과
꽃잎들이 내려와 반길 것이다.
애써 걸음을 재촉하지 말고 가자.
하루의 옆모습인 평온한 빛 그림자 아래서
잠시, 쉬었다 가자.
* 월간『우리詩』2019년 8월 374호 '신작소시집'에서
* 사진 : 2019년 2월 25일 충남 태안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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