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김병택 시집 '떠도는 바람'

김창집 2020. 2. 22. 01:47

 

♣ 시인의 말

 

   이 시집에는 바람이 수시로 등장한다. 한편, 바람이 등장하지 않는 시들에는 바람 대신 ‘내면의 바람’이 들어있다. 통틀어 말하면, 표제의 ‘바람’은 비유적 ․ 심리적 바람까지를 포괄하는 바람이다.

   바람의 의미가 읽는 이들에게 잘 전달되기를 기대해 본다.

 

                                                                                                          2019. 12

                                                                                                           김 병 택

 

 

♧ 나이 타령

 

    나이 타령을 하면서부터, 가을의 쓸쓸한 거리를 혼자 걷는 기분에, 우물에 빠져 쉽게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 같은 기분에 자주 사로잡힌다 어릴 때에는 하루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을 늘 품고 다녔는데, 이제는 나이를 묻는 말을 들으면 얼굴의 미세한 조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나이 드는 것이 반드시 나쁘다고만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좋다고만 할 수도 없다 좋고 나쁨을 떠나, 나이가 들면서 내 신경의 창에는 자주 네모꼴의 두려움이 펄럭인다 그것을 꼭 늙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늙음과 연루되는 것임은 분명하다

   나이는 비둘기처럼 날아오지 않고 까마귀처럼 달려온다

 

 

♧ 죽음보다 더한 일

 

   이 시골 동네에서 가장 순박한 사람으로 꼽히는 홍삼(63) 씨가 아침부터 정신이 나간 얼굴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동네 사람 서넛이 모여 수군댔을 뿐,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다 마침내, 내가 홍삼 씨에게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지인의 권유로 자기의 인생을 촘촘히 담은 자서전 노트를, 잠시 동네 가게에 다녀오려고 나가면서 마루의 낡은 궤짝 위에 놓아둔 자서전 노트를 누군가가 훔쳐갔다고 말하면서 한숨을 지었다

  “자서전을 다시 쓰세요”라고 내가 홍삼 씨에게 권했지만, 홍삼 씨는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끔찍한 일들을 다시 글로 써요? 차라리 내 인생이 아예 없었다고 치는 게 낫지 내 인생을 다시 글로 쓰는 건 죽음보다 더한 일이에요” 20여 년 전, 눈이 어지럽게 흩날리던 겨울날에 들은 말이었다.

 

                                       *김병택 시집『떠도는 바람』(새미, 201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