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면을 깨고 싶다, 바람아
제주의 토막대는 소리를 물고 있어 혈을 풀어주고 마디를 뚫어준다. 동박새 울음만 같은 음계 밖 피리소리
연신 늦가뭄에 빈혈 도진 이 섬은
응급 수혈로 수맥마다 관이 박혀
토박이 바람들 모여
겨울을 성토하는
이따금 터진 하늘로 새떼가 비상한다
이쯤이면 쇠똥에도 터를 잡은 산냉이꽃
앞질러 갓길 너머로
봄빛을 나르고 있다
아득하다 퍽퍽 불을 토하던 화산도여
혼절한 목련들 남쪽 가지가 따스하다
동면도 오늘 같으면
깨고 싶다, 바람아

♧ 숨은 꽃을 찾아서
동면을 꿈꿀 때쯤 더 마알간 기억으로
오일장 꽃저자를 사전 찾듯 뒤지는 건
꼭 하나 그리움 묻은
숨은 꽃 있음이다
내가 오름으로 나앉던 스무 살 무렵
휘파람새 울음에도 산등성이 허전하고
천제사 해인(海印)의 물소리
밤새 화두를 풀던
그해 한겨울을 한라산이 깨었어라
동굴 하나, 보살 하나, 스님 하나, 나 하나
빙설(氷雪)의 황홀한 둔덕
생명이 피었지
지금도 모른다 그 겨울꽃 세상 이름을
상식의 색깔로는 오히려 노랑인데
숨은 꽃 이름만으로
내 가슴은 야성 붉다

♧ 나비 3
이 세상 삶에 있어
몇 번이나 태어나나
무언가 숨은 뜻은
조금은 알듯한데
장자(莊子)도 한 평생
풀지 못한 수수께끼
나비가 날개로 우는 것은
비상의 죗값인가
삭정이 든 꽃대궁도
직립으로 떨고 있다
이 겨울
순백의 터엔
먼 윤회의 나래짓 하나
*홍성운 시집『숨은 꽃을 찾아서』(푸른숲, 1998)에서
*사진 : 요즘 한창 피기 시작한 산도화

--요 며칠은 제주에 세찬 바람이 불어
봄이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번은 한라산에 때 아닌 눈을 날렸다가
다시 한 번은 맑고 따뜻한 날씨로
그 눈을 다 녹이다가
다시 옷 속까지 파고드는 바람이 붑니다.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19로 정신이 사나운데
날씨마저 갈팡질팡 어지럽습니다.
이젠 정말 정신줄을 다잡고
긴 동면에서 깨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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