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권경업 시 '꽃을 피운 바람의 독백'과 현호색

김창집 2020. 3. 11. 14:43

 

♧ 꽃을 피운 바람의 독백

 

성스럽다며, 핑그르르

바라만 보아도 눈물이 돌아

뜨겁게 달아오른 이들

숱하게 몸 바치고 목숨 바치게 한

푸른 하늘 솟대 끝의 깃발도 펄럭이지 않는다면

아무도 우러러보지 않습니다

하물며 나부끼는 깃발도 그렇거늘

어디, 바람 없이 꽃이 핍디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스러지면서도 눈길 땡기고

흩어지면서도 분분히 눈길 쓸고 가는 것은

바람이 꽃을 피운 때문입니다

바람 없는데 향기는 왜 품겠으며

바람 없다는 말, 천지간에 꽃 한 송이 피지 않는

삭막하다는 뜻인데도, ‘그까짓

바람 좀 피운 일’이라시면

세상에, 무슨 일로 향기 번지며

바람 앞에 떨면서 그 숱한 꽃들은 피고 지겠습니까?

바람은 피우는 것입니다, 꽃처럼

들고 날 일 없는 적적한 포구(浦口)

돛을 올리고 닻을 감아야 할

내 작은 돛단배의 하얀 기폭(旗幅)도

바람 앞에 떨면서, 떨면서

가슴 한껏 부풀리고 싶은 것

꽃을 피우는 바람처럼

함께 가자고, 모두들 손에 손잡고

봄바람이 되어 가자고

바람이 붑니다, 꽃이 핍니다

봄날이 갑니다, 꽃이 집니다

 

 

♧ 등불

 

지치고 허기진

길 없는 내 그리움의 길

막막한 그 길의 끝, 해는 저물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등불로 서 있을 사람아

사랑은 아픈 것이 아니라

자신을 태워가며 아파하는 것

이제, 이 어둠의 끝이 오면

새벽 곤한 길 깨워 함께 가자

너의 아픔 내가 아파하며

새벽 길 깨워 함께 가자

 

 

♧ 사랑도 이와 같아서

 

발에 꼭 맞는 신발이

어디 잘 있습니까.

신다보면 때로는 뒤꿈치도 까지고

터진 물집도 갈앉고 해서 편해지면

그때부터, 먼 길이던 험한 길이던

함께 갈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나

사랑도 이와 같아서

때로는 삐걱이고 고통스럽더라도

굳은살 앉을 때까지 참고 가야지요.

 

아직도, 보드랍고 뽀얗던 고 앙증맞은 발의

오래된 신발로 남고 싶습니다.

 

 

                              *권경업 시집『꽃을 피운 바람의 독백』(도서출판 전망, 2013)에서

                                                    *사진 : 요즘 한창인 봄꽃 ‘현호색’

 

 

--전국 각지 산야에 곱게 피어났을 현호색,

   종류도 많고 색깔도 참 다양합니다.

 

   코로나19에 방안에 갇혀 있을 전국의 독자들께

   봄바람과 함께 꽃을 배달합니다.

 

   어서 빨리 평온이 찾아와

   일상의 행복으로 복귀하기를

   두 손 모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