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새는 날아가고 - 양희영
어느새란 철새
섣달 초하루 날아와
열두 달 나뭇가지 있는 대로 흔들며
도대체
왜 이러고 있니
가슴 콕콕 쪼아댄다
이럴 걸 저럴 걸
또 그럴 걸 중얼대며
하나라도 이룰까, 기를 쓰고 울다가
그믐날
새해를 향해
날아간다, 어느새
--<정음시조> (2019, 창간호)
♧ 9회 말 투아웃 2사 만루 - 용창선
직구로만 승부하던 눈빛은 무뎌졌고
방어율이 낮았던 청춘도 시들었다
가슴의 흉터 같은 실밥
꼭 쥐고 서있다.
커브처럼 휘어지는 골목길의 불안과
포크볼로 떨어지는 목덜미의 빗방울이
외로움 쌓인 세상에
내던져져 있었다.
내 손을 떠난 공이 타석으로 날아간다.
화살을 떠나보낸 활시위가 떠는 순간
딱! 하는 소리와 함께
타구가 날아간다.
--<공시사> (2018년 12월)
♧ 돌의 맥박 – 우은숙
삼랑진 만어사에는 바다에서 헤엄쳐 온
고기들이 돌 되어 층층이 누워 있다
그들의 이천 년 전 맥박 두 손으로 만져본다
지느러미 찾으려 집어 든 돌 속엔
검푸른 입술마다 새겨진 언어들이
떠돌던 마음의 부표 화석으로 증언한다
비늘과 꼬리는 시간 속에 감췄지만
원시의 경전으로 읽어내는 이 시간
굳어진 가슴팍에선 바다 냄새 아직 난다
--<문학청춘> (2019, 여름호)
♧ 붉은오름 - 이숙경
사나흘 괴어 있다 은연히 스며들어
감감한 어둠 속에서 울음을 매만진다
마음이 쏟아져 버릴까 온몸을 웅크린다
긴 관을 타고 오는 굵직한 떨림이
두세 번 끊어졌다 부풀어 가는 동안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징소리가 들린다
슬픔을 아우르는 넉넉한 소리 품새
나 대신 흐느끼고 소멸하는 사려니 숲
갈앉아 피붙이처럼 삼나무로 서 있다
--<시조미학> (2019, 여름호)
♧ 사막풀 – 정수자
둥글게 몸을 말며 결전에 든 건기의 풀들
칼바람 칠 때마다 날을 물고 구른다
필생의 맞장을 뜨듯 위리圍籬로 먹을 갈듯
멀리서도 살을 찢는 잉걸불의 혓바닥들
오라, 같이 울 만한 사막의 권속이여
가시도 오리 씹으면 비백飛白으로 솟을지니
--<다층> (20018, 겨울호)
* 정드리문학 제8집 『손말』 (다층현대시조시인선 006)
‘정드리 창에 비친 좋은 시조’에서
* 사진 : 물영아리오름 물보라길에서 찍은 ‘떡윤노리’(2020.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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