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사려니 숲길을 걷다
코로나 19로
모두가 갇혀 있는 것 같은 세상,
이곳 나무와 꽃 소식이 궁금하여
사려니숲길로 들어선다.
도종환 시인의 시를 다시 읽어보고
입구를 통과하면서 주변을 보니,
지난 5월초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조금은 절제했으면 하는 분들의 염려 때문인지
사람들 모습이 너무 뜸하다.
이쪽 5.16도로에서 진입하는 곳에는
주차장이 너무 먼 곳에 떨어져 있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불편해서인지
남조로변 진입로로 몰린다고 하나,
동쪽에서 오는 사람들도 자주 보이질 않는다.
자연에 사람들이 조금 몰린다 한들
맑은 공기가 있고 열려 있는 공간인데
무슨 큰 감염이 있으랴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당국이 너무 예민한 건 아닌가 생각하며 걷는다.
이 맑은 자연과 공기를
우리 일행 다섯이서만 즐기는 것이
너무 과분하여 죄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긴 비행기 타고 제주로 건너오는 것 자체가
큰 용기가 필요한 시점인데
오고 픈들 어쩔 것인가?
하루빨리 전염병의 공포에서 벗어나
이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는
웃음이 가득한 숲길을 고대해본다.
♧ 사려니 숲길 - 도종환
어제도 사막모래 언덕을 넘었구나 싶은 날
내 말을 가만히 웃으며 들어주는 이와
오래 걷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보다 다섯 배 열 배나 큰 나무들이
몇 시간씩 우리를 가려주는 길
종처럼 생긴 때죽나무 꽃들이
오 리 십 리 줄지어 서서
조그맣고 짙은 향기의 종소리를 울리는 길
이제 그만 초록으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는
산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것들을 주체하기 어려운 날
마음도 건천이 된 지 오래인 날
쏟아진 빗줄기가 순식간에 천미천 같은 개울을 이루고
우리도 환호작약하며 물줄기를 따라가는 길
나도 그대도 단풍드는 날이 오리라는 걸
받아들이게 하는 가을 서어나무 길
길을 끊어 놓은 폭설이
오늘 하루의 속도를 늦추게 해 준 걸
고맙게 받아들인 삼나무 숲길
문득 짐을 싸서 그곳으로 가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라산 중산간
신역(神域)으로 뻗어 있는 사려니 숲길 같은
♧ 사려니 숲길을 걸으며 - 潤疇 목필균
때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가 신성하다는
사려니 숲길로 예약 없이 들어선다
빼곡한 숲 사이로 흐르는
기분 좋은 바람
맨발로 걸어도 좋을 적톳길
드문드문 열려있는 푸른 하늘이 보내는
눈부신 햇살
온몸으로 호흡하며
홀로 걸어도 좋을 느낌표들
사는 일이 예약된 것만으로 채워진다면
어려운 일들 풀어가며 살 일이 있을까
사철 푸른 조릿대 길도
발걸음마다 자갈자갈 대답하는 송이 길도
쭉쭉 벋은 삼나무 길도
사려니 숲길의 한 가닥인 것을
가다가 돌아서 간들 누가 뭐라 할까
♧ 제주 사려니 숲길을 걸으며 – 東山 박태강
아름드리나무 빽빽이 늘어선 한라산 중턱 숲길을
수많은 연인 부부 친구 가족들
발걸음 보면
삶이 건강으로 이어져 행복을 찾는 길
높은 산길 물소리 하나 없이
이따금 들려오는 까옥 까옥 까마귀 소리
무엇이 바쁜지
말없이
재촉하는 숲길
수백 년 살면서 보는 나무
고작 백년을 못살고 가는 인생
너에게서 생명을 구하려
오늘도 많은 사람
바쁜 걸음 걷노라 !
너 가슴에 안기면
기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에
먼 길 와서
너 품에 안겨
삶의 오르가즘을 느끼노라.
♧ 방심 - 정진용
잠시 가만히 앉았다 가세요.
사려니숲까지 와서 나무 의자에 앉았다면
아들이 내신 1등급이라는 자랑이며
엊그제 먹었던 돌돔의 식감 같은 거
혀로 돌돌 말아 엄니로 사려 물고
조금이라도 침묵 하늘이랑 놀다 가시지요.
여기저기 주르르 서 계신 삼나무께는
집값 얘기 따위야 낙엽일 뿐이잖아요.
주식 시세로 숲 흔들면 미안하잖아요.
저 오래된 삼나무의 올해 연세며
삼나무 뿌리가 바위 헤집는 데 쏟은 눈물
가만가만 들여다보면 안 될까요.
이런 것도 싫으면 말없이 있다 가세요.
큰 소리 삼가고 사풋사풋 걸어가세요.
귀 밝은 삼나무 싹이 낮잠 자고 있으니까요.
여기까지 오셨으면 시누가 돈만 많다고 흉보지 마세요.
지인의 항암 얘기는 숲 바깥에 놓고 오세요.
미처 못 놓고 왔다면 안내소에 맡기세요.
여기는 사려니숲이니까 삼가,
삼가, 가만히 앉았다 가세요.
-201904 공정한 시인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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