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된 나무 - 윤준경
-선운산 장사송
오래된 나무를 보면
나 그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그와 한 몸 이루고 싶다
그 속에 작은 둥지를 틀고
그의 600년 역사가 되어
나이테에 박힌 의지를 따라
숲의 번식을 꿈꾸고 싶다
그가 살아온 거대한 숙명에 무릎 꿇고
다시 나무로 태어나는
아름다운 윤회를 거듭하며
오래된 나무가 풍기는 깊고 푸른 향
아름드리 그늘의 역사를 널리 퍼뜨리고 싶다
무념 무욕의 나무가 되어, 하늘 끝
신의 메시지를 인간 세상에 전하면
두 손 높이 들고 나, 스스로에게
경배하는 아침
순수한 목질의 영혼을 지닌, 나
완벽한 신화이고 싶다
♧ 자작나무의 눈물
아들이 자작나무 물을 가져왔다
물오른 자작나무에서 빼낸 물,
노폐물이 싹 빠진다고 어서 마시라고
에미가 제게 보약 다려 먹이듯
한 컵 가득 들이민다
풋풋한 나무의 향, 처음엔 싱싱한 수액이더니
마실수록 찝찔한 자작나무 눈물이 들어있다
뿌연 눈물에 자작나무 붉은 피가 섞여있다
칼바람을 마시며
젖을 빨아올린 자작나무, 내 안에 들어와
끙끙 신음을 토한다
여기저기 갈라진 틈을 채우며
팍팍한 생을 어루만지며
자작나무 제 눈물로 나를 다독인다
한그루 자작나무 나, 푸르게 일어선다
♧ 은행나무 연가
우리 집 은행나무는 혼자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짝이 없던 은행나무는
연못 속에서 짝을 찾았다
그것이 제 그림자인줄 모르고
물속에서 눈이 맞은 은행나무
물에 비친 제 그림자에 몸을 포개고
만 명도 넘게 아기를 가졌다
물방개는 망을 보고
연잎은 신방을 지켜주었다
해마다 가지 사이에 돌멩이를 얹고
그림자에게 시집 간 은행나무
한 가마니씩 은행이 나와도
그것이 그리움의 사리인줄 몰랐다
바람이 세게 불 때마다
연못이 걱정되는 은행나무는
날마다 그 쪽으로 잎을 날려 보내더니
살얼음이 연못을 덮쳤을 때 은행잎은,
연못을 꼭 안은 채 얼어있었다
♧ 꽃봉오리를 깨우는 노래
잔인한 4월, 바다가
꽃으로 붉었다
파도가 생으로 울어
막 피려던 수많은 꽃봉오리
그 어린 연분홍을
독한 물살에 던지고
푸른 영혼이 아프게 우짖는 소리
천지에 쟁쟁했다
새봄의 푸른 대지엔
희망의 노래가 멎고
슬프다,
그대로 인하여 우리는 다시금
사립을 고치나니
눈물에 절여진 여린 꽃잎
끝내 피지 못한 너를 가슴에 묻으며
자꾸만 네 이름을 불러 깨운다
꽃봉오리여,
돌아오는 길을 알지 못하는
어린 영혼들이여
일어나거라, 어둠을 박차고
그대들의 땅에서
어여쁘게 피어나거라
그대로 인하여 우리는
흔들리는 주춧돌을 고쳐 놓느니
♧ 물의 상처
늦은 밤 냇가를 거닐다보면
하염없이 흐느끼는
물의 울음소리 들린다
차르륵 차르륵 제 살갗을 찢으며
낮게 엎드려 우는 소리
저 맑은 물에 누가 상처를 내었나
누가 돌을 던져 물을 울게 했나
풀잎들 선 채로 잠이 깊고
별빛 자부룩이 물 위에 떠오를 때
혼자서 냇가를 거닐다보면
내 속의 상처
하나 둘 아물어간다
금간 가슴을 살살 쓸어주며
흘러가는 물
알 것 같다, 물이 우는 이유
누군가의 상처를 씻어주다 보면
물은 아파서
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산림문학』 2020 여름호(통권38호)
<산림문학>이 만난 문인 윤준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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