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진하 시집 '제웅의 노래'의 시(4)

김창집 2021. 12. 20. 00:22

 

이 꽃 또한 사라지리라

 

이 꽃 또한 지리라

엊그제 화려하던 벚꽃 사라졌듯이

얼마 전에 피었던 진달래 개나리 지었듯이

오늘 보는 이 꽃들

복사꽃 살구꽃 사과꽃 모두

옛날의 구름처럼 사라지리라

이 기후 변화의 시대에

순서도 차례도 없이 피는

어지러운 봄꽃들

남북극 빙하가 녹아내리는 시대에

하얀 눈처럼 얼음처럼

너의 웃음도 나의 울음도

모두 꽃처럼 지리라

오늘 보는 이 꽃 또한 사라지리라

 

 

시시비비

 

많고 많은 시인들 중에

수많은 시시한 시인들 틈에

시답잖은 시나 끼적이며

시비나 걸어볼까

 

시냐 비시냐 반시냐

고백이냐 독백이냐 넋두리냐

서정에 체험에 자전에

몽니나 부려볼까

 

아마추어적으로

아마도 아주 추하게

오전에 정오에 자정 너머에

흠흠한 서정으로

 

시시비비 가려

푸줏간에 붉게 걸리는

비릿한 시

주검에 시비나 걸어볼까

 

 

어떤 시

 

동네 어귀에 식당이 하나 생겼는데

쇠고기 판다고 간판이 어서오우, 였다

가난한 동네에 쇠고기 사 먹을 만한 사람 몇이겠나

한 몇 달 해 보다가 안 되었던지

오리고기 파는 집으로 슬쩍 바꿔 달았다

이름하여, 어서오리!

이쯤 하면 한 번은 들를 수밖에!

 

 

, 수선!

 

수선화를 처음 본 열두 살

서늘한 초록빛 줄기 사이로

노란 블라우스에 작은 얼굴

계집애들 틈에 부끄러이 끼어

개구리 합창을 배우던 시절

자그마한 체구에 풍금을 치던

그 선생님 이름은 오수선!

보랏빛 구두에 투피스 정장을 입고

분 냄새 향긋하게 풍기며

당신의 이름을 닮은 꽃이 있다고 하던

열두 살 여린 내 마음

처음으로 수선을 떨기도 하던

 

 

이번 생은

 

이번 생은 이렇게 지납니다

한때는 돈도 좀 만졌지요

일꾼 네댓 거느리고 업체도 운영했고요

뭐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시대라고 해야 하나

삶을 확 비틀어 놓는 그런 것들이 있습디다

믿음에 흥하고 믿음에 속는 거죠

목숨 하나 건지고 식솔들은 흩어지고

외항선 타고 떠돌다가 돌아온 게 선창이에요

어느새 나이는 여든을 넘었는데

어물전에 얼음 실어다 주며 삽니다

불같은 인생 식히려면 다른 일 있겠어요?

다음에 한 번 더 삶이 주어질까요?

 

 

지푸라기 인형의 독백

 

매일 아침 보는 내 얼굴은 낯설다

아주 오래전부터 날마다 조금씩 나는 변해 왔다

하룻밤 새 어둑하게 자란 수염 자국 만져 보며

다시 익숙해지려 면도질을 하면

잠깐 어제의 모습이 되살아난다

지난밤에 쓰다 만 일기에서 멈춘 모습으로

 

외롭다는 말은 언제나 내가 내게 하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 독백은 없다

나는 나에게서 뿔처럼 돋아나 우뚝하니 불편하고

달팽이의 촉수처럼 나를 제일 먼저 돌아본다

어설피 끌고 다닐 몸뚱어리며 가벼운 집이며

그 낯선 외피가 가장 가까운 나다

 

어제는 사랑 노래를 부르며 울었다

홀로 부르는 나의 노래의 관객은 나였고

나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낯설었다

어둠의 반경 속에서 너의 목소리를 듣는다

우울은 나의 두 개의 감각의 거리에 비례한다

허깨비처럼 나는 오감과 육감을 넘나든다

 

또 하나의 내가 망각된다면 조금 더 행복해질 거다

손녀의 결혼식 뒤에 울음을 터트린 외할머니처럼

헤어지는 일에 익숙해지기에는 아직 먼 시간

다만 나는 아내와 아이들의 목소리를 종종 잊고

잃어버리지도 잊지도 못하는 메아리를 듣는다

시간에 갇히고 길을 잃은 신들의 음성을

 

사랑의 노래는 언제나 독백이다

내가 너를 부르며 내게 부르는 노래

영원히 네가 듣지 못할 이별의 노래다

내겐 다만 무거워지는 허리와 흐릿한 눈빛과

쉬 갈라지는 목소리밖에 남은 것이 없다

역사와 이념과 추억은 갈래갈래 흘러가고

 

모든 아버지의 독백은 눈빛의 기억일 뿐

영면의 가장자리에서 애모의 노래를 들을 때

우물거리는 입술과 붉어지는 눈시울

아무도 듣지 못하는 혼잣말을 잠시 되뇌다가

어느새 안락의 잠에 빠져 버리는 나날

꽃잠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 라일락 피고

 

지난해의 향기를 맡으면서 다시 부르는 노래

나는 낙천적인 아내를 오래 사랑할 것이다

그녀의 긴 머리칼로 우묵한 요람도 짤 것이다

그 깊은 자리에서 조금 더 외로울 것이고

그녀의 몸속을 유영하는 아주 작은 피톨들과

잠꼬대하며 뒤채는 어린 발들을 만질 것이다

 

 

                  *진하 시집 제웅의 노래(시작시인선 0394, 20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