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바람
친구여, 그대 혹여 제주에 오신다면
소박하나마 그냥 제주바람 한 상 잘 차려 먹이고 싶네
꽃구경도 좋고 이름난 맛집 식탐도 말리지 않겠지만
무엇보다 제주의 속살 샅샅이 보고자 한다면
무시로 들락퀴는 바람 세례 마땅히 가슴받이 해야 하지 않겠나
난바다 온통 갈아엎는 제주바람에는 이 땅 통곡의 세월과
제주사람들 일구어온 인고의 삶 마디마디 새겨져 있거든
친구여, 그대 정녕 제주를 그리워하신다면
이곳에 와 제주바람 한 대접 허물없이 들이키고 가시게나
♧ 바람과 잎새
바람이 손을 흔들어
작은 잎새의 몸을
은근슬쩍 뒤집는다
바람은 늘 뒤켠만 지키는
잎새들이 안쓰러웠을 거야
세상 구경도 좀 시켜주고
맑은 햇볕에 멱도 감겨주고 싶었을 거야
잎새들이 몸을 흔들면서
떼 지어 재롱춤을 춘다
잎새들은 자신의 씻긴 몸을
눈부시게 뽐내고 싶었을 거야
부드러운 손길의 크낙한 정을
온 세상에 전하고 싶었을 거야
바람과 잎새들이 펼쳐내는
절로 그렇게 이루어진
마음 세상이
싱그러운 아름다움
♧ 생기
영실천 단풍들은
지난 가을 제 몸을 활짝 피워내곤
팍팍한 삶의 길 지쳐
산 오르는 사람들에게
제 살 내어주고
안쓰러운 마음도 내주고는
그냥 무연(憮然)하게 서 있다가
새봄이 와서
산 넘어 나들이 온 어린 바람 한 자리
데불고 동무를 하네
이뻐서 이뻐서 죽겠어
무등 태우고 볼 비비며
간지럼에 벙긋벙긋 웃다가
그만 가슴 깊은 곳 묻어두었던
설레임 도져 얼굴 살포시 물들이네
바람 한 자락이 피워내는
저 생기의 몸짓!
♧ 경(經)
눈 덮인 골짜기
무게 이기지 못해
억겁 시간 끊어내듯
쌓인 눈
툭툭 무너지는
바위 아래
노란 복수초
환하게
꽃잎 벙글다
세상 잠시 멈추었다
개울 물
청아하게 흘러가는 소리에
경(經) 한 구절
새로이
피어나다
♧ 흰털괭이눈
문득
그대가 그리워
눈밭 속 정처 없이 걸었습니다
아득히 천년도 전의
고요가 내려앉은
곶자왈 그늘 한 귀퉁이
하얗게 쌓인 눈두덕 사이로
흰털괭이눈이 노랗게
노랗게 꽃을 피웠습니다
봄은 아직 한참인데
흰털괭이눈 꽃잎이 술잔처럼
벌어져 나를 취하게 합니다
알 까고 나온 새 새끼 주둥이 같은
노오란 꽃술이 내 그리움을 쪽쪽쪽 빱니다
천년의 고요가 그냥 다 환해집니다
그리움도 천년만큼 깊어지면
환장할 꽃 두세 송이쯤
피워낼 수 있을까요
♧ 이덕구의 숟가락
놋쇠 숟가락 하나로 남은 사내를 생각한다
금수저 흙수저 가릴 것 없이 압제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사내
숟가락의 평등과 자유를 위하여 혁명의 길을 나선 사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바람처럼 날래었다 하지
날개 달린 아기장수였다고도 했네
한라산 조릿대 같은 이 땅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따숩게 숟가락의 정 나누는
그런 밥상의 삶을 이루고자 했을 뿐인데
풍찬노숙의 가열찬 항쟁 끝
죽어 광장 십자가에 효수된 젊은 사령관
모가지 부러진
붉은 동백꽃 같았다 하네
누군가 조롱인지 위무인지 그의 가슴 주머니
훈장처럼 숟가락을 꽂아놓았다 하지
조롱 받은 나사렛 청년의
가시면류관처럼 빛나지는 않으나
마지막 그의 숟가락은 낮달처럼 하늘에 걸려
지지 않는 혁명을 떠올리게 하네
시방도 거센 바람 불어와 사방팔방
동백꽃 모가지 뚝 뚝 떨어지는데
이 땅 어디선가는
그의 살아생전 형형한 눈빛 닮은
또 다른 동백꽃들이 피어나
한 세상 붉게 붉게 물들이고 있겠지
* 김승립 시집 『벌레 한 마리의 시』 (삶창시선, 20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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