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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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항쟁 120주년 작품집 '장두'의 시(2)

김창집 2021. 12. 26. 00:10

 

별의 기원 김영란

 

  동광 육거리에 저항의 뿌리 하나

  불귀의 객이 된 청년들이 보인다 탐라의 푸른 들판 붉은 피로 젖던 그 날, 풀뿌리 하나에도 세금이 매겨지고 신목이 잘리고 당목이 베어지던, 진정한 해방은 공출 없는 세상이라 탄압이면 저항이라 물러설 수 없는 분노 첫머리에 이름 얹던 젊은 피가 솟구치며 외친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신새벽 동쪽 하늘에 외롭고 높은 그 별

 

 

꽃무릇에 대하여 김영숙

 

귓것아 귓것아

아이고 이 귓것아

 

곧 죽어도 할 말은 하는

아이고 이 귓것아

 

방년芳年의 이재수처럼 붉게 타고 지는 꽃아

 

귓것아 귓것아

그래도 이 귓것아

 

꽃 진 자리 푸른 잎 장두 힘줄 보아라

 

귓것들 뼈 때린 무늬 오늘 또 내미는 꽃아

 

그 날 가고 그 시절 가고 몇 갑자를 돌아도

아닌 건 아닌 겁주제주 사람 가슴에 심은

 

사람이 사는 세상아,

새끼 차며 흐르는 꿈아

 

 

밑변의 반란 - 김정숙

 

바닥의 역사는 세모를 굴리는 것

아래로

아래로

섬 끝까지

내려온 권력

신축년 봄날을 잡아

밑변 일으켜 세웠다

 

받들 수 없는 권력은 권력이 아니라고

일어설 수 없는 백성은 백성이 아니라고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 목숨을 걸어놓고

 

쓰러지고 뒹굴어도 바닥은 살아있다

예각의 꼭짓점 팽팽히 당겨 쥐고

본능적 야생의 밑변

굴러 다시 바닥으로

 

 

밥의 이름으로 - 김희정

   -신축항쟁 120주년에 부쳐

 

밥이 없으면

목숨을 내놓으라고 했다

더 이상 내놓을 것이 없었다

피할 곳 없어 농기구를 들었다

반란이라고 이름 붙였다

 

백성의 이름은 밥이다

이름이 없으면 죽은 목숨이다

이름을 찾고자 했다

주의 이름으로 백성을 괴롭힌 자는

거짓 이름이다, 가짜 이름이다

밥 한 그릇 베고자 들었던 낫은

항쟁이었다

 

,

그 이름 아래 식구들이 앉아있다

어떤 이름도 밥보다 신성할 수 없다

백성의 이름으로

밥의 이름으로 흘린, 거룩한 피였다

 

 

모슬봉 엉겅퀴 한희정

 

, 떨구지 못해 한 올 한 올 찢었구나

눈물은 가시 되어 백 년을 버텼구나

먼 후일

예감을 한 듯

어미의 힘은 강하구나

 

아픔도 억울함도 반상班常이 다를 까만

이재수 장두의 모친 가슴에 든 봉분 하나

정축생丁丑生

반골의 증거

놓지 못한 불씨였구나

 

계절이 가고 오듯 넋은 살아 오고 가네

대접조차 받은 적 없어 한뎃잠이 더 편한

모슬봉

맨발로 오르는

성녀 한 분 계시다

 

 

한라의 띠풀 이애자

 

봐라

활시위 풀고 살아나는 능선을,

결과 결이 닿아 한데 엉겨 쓰러지나니 초여름 앞섶을 푸는 저 바람 믿지 마라

기러기 같은 쟁기 몸통 속을 돌고나와 가닥가닥 꼬인 줄 초가의 바람을 엮던 손 굵은 아비의 아비 몰테우리 후손이 가슴에 불이 일면 푸른 갈기 죄다 태워 한라산 밑자락에 다시 와 터를 지키는 섬사람 곧은 심지가 유월들판을 밝혔나니

 

봐라

풀기가 가시지 않은 삘기 꽃, 먹물 밴 하늘 아래 붓끝이 흔들린다

때로는 바람에 맞서 종서를 고집하나니

모의 촉만으로도 바람을 읽었나니

순순히 등을 내줘 골백번 더 흔들렸을 휘어진 여린 풀잎의 감춘 날을 보았나니

 

꺾이지 마라

휘둘리지도 마라

짓밟혀 내린 뿌리 다지고 다져서 하나로 띠를 이루어 이 섬을 지켰나니

 

섬의 낙인처럼 낮달 가리어지고 핏빛노을 내려앉은 밥상머리 탁주 한 사발,

곤한 몸 하루하루가 할아버지 평안이었나니

 

 

                        * 신축항쟁 120주년 기념 작품집 장두(사단법인 제주민예총, 2021)에서

                                                       * 사진 : 한라산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