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의 기원 – 김영란
동광 육거리에 저항의 뿌리 하나
불귀의 객이 된 청년들이 보인다 탐라의 푸른 들판 붉은 피로 젖던 그 날, 풀뿌리 하나에도 세금이 매겨지고 신목이 잘리고 당목이 베어지던, 진정한 해방은 공출 없는 세상이라 탄압이면 저항이라 물러설 수 없는 분노 첫머리에 이름 얹던 젊은 피가 솟구치며 외친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신새벽 동쪽 하늘에 외롭고 높은 그 별
♧ 꽃무릇에 대하여 – 김영숙
귓것아 귓것아
아이고 이 귓것아
곧 죽어도 할 말은 하는
아이고 이 귓것아
방년芳年의 이재수처럼 붉게 타고 지는 꽃아
귓것아 귓것아
그래도 이 귓것아
꽃 진 자리 푸른 잎 장두 힘줄 보아라
귓것들 뼈 때린 무늬 오늘 또 내미는 꽃아
그 날 가고 그 시절 가고 몇 갑자를 돌아도
‘아닌 건 아닌 겁주’ 제주 사람 가슴에 심은
사람이 사는 세상아,
새끼 차며 흐르는 꿈아
♧ 밑변의 반란 - 김정숙
바닥의 역사는 세모를 굴리는 것
아래로
아래로
섬 끝까지
내려온 권력
신축년 봄날을 잡아
밑변 일으켜 세웠다
받들 수 없는 권력은 권력이 아니라고
일어설 수 없는 백성은 백성이 아니라고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 목숨을 걸어놓고
쓰러지고 뒹굴어도 바닥은 살아있다
예각의 꼭짓점 팽팽히 당겨 쥐고
본능적 야생의 밑변
굴러 다시 바닥으로
♧ 밥의 이름으로 - 김희정
-신축항쟁 120주년에 부쳐
밥이 없으면
목숨을 내놓으라고 했다
더 이상 내놓을 것이 없었다
피할 곳 없어 농기구를 들었다
반란이라고 이름 붙였다
백성의 이름은 밥이다
이름이 없으면 죽은 목숨이다
이름을 찾고자 했다
주의 이름으로 백성을 괴롭힌 자는
거짓 이름이다, 가짜 이름이다
밥 한 그릇 베고자 들었던 낫은
항쟁이었다
밥,
그 이름 아래 식구들이 앉아있다
어떤 이름도 밥보다 신성할 수 없다
백성의 이름으로
밥의 이름으로 흘린, 거룩한 피였다
♧ 모슬봉 엉겅퀴 – 한희정
툭, 떨구지 못해 한 올 한 올 찢었구나
눈물은 가시 되어 백 년을 버텼구나
먼 후일
예감을 한 듯
어미의 힘은 강하구나
아픔도 억울함도 반상班常이 다를 까만
이재수 장두의 모친 가슴에 든 봉분 하나
정축생丁丑生
반골의 증거
놓지 못한 불씨였구나
계절이 가고 오듯 넋은 살아 오고 가네
대접조차 받은 적 없어 한뎃잠이 더 편한
모슬봉
맨발로 오르는
성녀 한 분 계시다
♧ 한라의 띠풀 – 이애자
봐라
활시위 풀고 살아나는 능선을,
결과 결이 닿아 한데 엉겨 쓰러지나니 초여름 앞섶을 푸는 저 바람 믿지 마라
기러기 같은 쟁기 몸통 속을 돌고나와 가닥가닥 꼬인 줄 초가의 바람을 엮던 손 굵은 아비의 아비 몰테우리 후손이 가슴에 불이 일면 푸른 갈기 죄다 태워 한라산 밑자락에 다시 와 터를 지키는 섬사람 곧은 심지가 유월들판을 밝혔나니
봐라
풀기가 가시지 않은 삘기 꽃, 먹물 밴 하늘 아래 붓끝이 흔들린다
때로는 바람에 맞서 종서를 고집하나니
모의 촉만으로도 바람을 읽었나니
순순히 등을 내줘 골백번 더 흔들렸을 휘어진 여린 풀잎의 감춘 날을 보았나니
꺾이지 마라
휘둘리지도 마라
짓밟혀 내린 뿌리 다지고 다져서 하나로 띠를 이루어 이 섬을 지켰나니
섬의 낙인처럼 낮달 가리어지고 핏빛노을 내려앉은 밥상머리 탁주 한 사발,
곤한 몸 하루하루가 할아버지 평안이었나니
* 신축항쟁 120주년 기념 작품집 『장두』 (사단법인 제주민예총, 2021)에서
* 사진 : 한라산 겨울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하 시집 '제웅의 노래'의 시(5) (0) | 2021.12.28 |
---|---|
김도경 시집 '어른아이들의 집(集)' 발간 (0) | 2021.12.27 |
양성평등 지원사업 '시화전'의 시조(1) (0) | 2021.12.25 |
산림문학 2021년 녹색문학 수상자 임동윤 시인의 시 (0) | 2021.12.24 |
월간 '우리詩' 2021년 12월 402호의 시(4) (0) | 2021.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