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진하 시집 '제웅의 노래'의 시(5)

김창집 2021. 12. 28. 00:27

 

가을의 노래

   -문충성 시인을 기리며

 

찬란하구나, 가을이여!

벌겋게 타오르던 나뭇잎들

누렇게 흩어지며 지는 날

파란 하늘에 구름 두둥실

하얗게 열리는 허공

인생을 사랑하던 시인은

만장輓章도 없이 먼 길을 떠나고

햇살 속에 환히 빛나는 무지개

장엄하구나, 말 없는 늦가을이여!

 

쓸쓸하구나, 가을이여!

하늬바람 불어오는 북쪽하늘

멀구슬나무 열매 노랗게 영그는데

시인의 노랫소리 아득하고

검은 바닷가에 억새꽃 사각사각

어디선가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제주 바다 거센 파도 밟으며

수평선을 넘어가는 빈 그림자

처연하구나, 가을, 가을이여!

 

 

역사

 

역사는 상처다

유토피아는 항상 유보되는 꿈

 

끝내 태어나지 못한 너

비겁한 역사의식에 짓눌려 사산해 버린 너

 

삶은 역사에 대한 사죄

태어난 너와 태어나지 못한 너에 대한 속죄

 

태어났더라면 희망을 노래하는 시인이거나

절망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을 너

 

너는 도래하지 못한 역사로 남겨지고

나는 너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과 속죄로 살아간다

 

 

원망

 

신이시여,

정녕 당신께서 만드셨단 말씀인가요?

이 엉터리 세상을!

 

시인이여,

설마 당신이 노래하겠단 말인가요?

이 어처구니없는 역사를!

 

시인하세요.

저 침묵하는 물귀신에게 굴복했다고

시인하세요.

저 음흉한 권력에 무력했다고

 

어지러운 시인들의 말

어질러진 신들의 말

검은 바다에 흩어질 때

아이들의 노랫소리 구천을 떠도네.

 

 

고백

 

한 시인이 가난하게 살다가 세상을 떴다

흔한 일이다

세상은 가난하고 시인은 많다

남모르게 날마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

 

오늘은 그냥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리라

주문처럼 나는 너를 나처럼 사랑한다고

살아 있는 한 사랑한다고

마지막 숨결까지 두근거리는 사랑이라고

 

너는 내가 가장 나중에 배운 말이다

세상과 나 사이에서

너라는 이인칭은 종종 잊히고 지워진다

아직 사랑한다는 말을 떠올리지도 못했을 때

 

세상을 향해 던지는 말들은 바람에 떠돌다가

너의 가슴에 박히는 가시가 된다

너는 언제나 나의 상처였다

쉽게 망각되는 사랑의 그늘이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진부하다

시인은 그 말을 남기고 갔다

세상은 가난하고 시인은 떠났지만

진부한 삶은 사랑으로 가까스로 사람을 이어 놓는다

 

 

닭국숫집 서가

 

여주인은 시 읽기를 좋아하고

닭국수를 판다

 

손님은 국숫집 서가에 꽂힌 시집들을

곁눈질로 훔쳐본다

 

무명 시인을 알아보는 이는 없고

닭을 삶아 넣은 국수는 맛이 좋았다

 

여주인은 국수를 팔고

한가해진 오후엔 시를 읽는다

 

 

시집을 읽다

 

시인들이 한 세대 빠른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한 세대 느리다.

늦은 나이에 문학상 수상 시집들을 읽는다.

 

그 동안 나의 젊음은 너무 바빴다, 시 없이도 잘도 흘러간 시간들.

아내는 조금 늙었고 애들은 수숫대처럼 자랐다.

 

아내는 이제 젊은 시절의 유행가를 조금 느리게 부르고

내 연배의 시인들은 너무 젊거나 늙어 보여서 조금 놀란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시인들은 이제는 절필이거나 지리멸렬이다.

또 어떤 이는 세상을 떴지만, 그래도 조로보다는 낫다.

 

초로의 시인이 예언가이기 어려운 까닭은

오로지 청춘의 문턱만이 오만한 예언의 장소인 까닭이다.

 

별과 하늘과 꿈의 사다리를 만든 건 그래도 시인들이다.

그 덕에 나는 조금 높은 꼭대기도 보았고 죽음의 호곡 소리도 들었다.

 

이제는 다시 저 평지의 언어가 그리운 걸까.

아이들의 말이 새삼 귀에 와 닿고 나물 반찬 씹는 맛을 알 것도 같다.

 

 

                     *진하 시집 제웅의 노래(천년의 시작, 2021)에서

                                           *사진 :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