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의 노래
-문충성 시인을 기리며
찬란하구나, 가을이여!
벌겋게 타오르던 나뭇잎들
누렇게 흩어지며 지는 날
파란 하늘에 구름 두둥실
하얗게 열리는 허공
인생을 사랑하던 시인은
만장輓章도 없이 먼 길을 떠나고
햇살 속에 환히 빛나는 무지개
장엄하구나, 말 없는 늦가을이여!
쓸쓸하구나, 가을이여!
하늬바람 불어오는 북쪽하늘
멀구슬나무 열매 노랗게 영그는데
시인의 노랫소리 아득하고
검은 바닷가에 억새꽃 사각사각
어디선가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제주 바다 거센 파도 밟으며
수평선을 넘어가는 빈 그림자
처연하구나, 가을, 가을이여!
♧ 역사
역사는 상처다
유토피아는 항상 유보되는 꿈
끝내 태어나지 못한 너
비겁한 역사의식에 짓눌려 사산해 버린 너
삶은 역사에 대한 사죄
태어난 너와 태어나지 못한 너에 대한 속죄
태어났더라면 희망을 노래하는 시인이거나
절망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을 너
너는 도래하지 못한 역사로 남겨지고
나는 너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과 속죄로 살아간다
♧ 원망
신이시여,
정녕 당신께서 만드셨단 말씀인가요?
이 엉터리 세상을!
시인이여,
설마 당신이 노래하겠단 말인가요?
이 어처구니없는 역사를!
시인하세요.
저 침묵하는 물귀신에게 굴복했다고
시인하세요.
저 음흉한 권력에 무력했다고
어지러운 시인들의 말
어질러진 신들의 말
검은 바다에 흩어질 때
아이들의 노랫소리 구천을 떠도네.
♧ 고백
한 시인이 가난하게 살다가 세상을 떴다
흔한 일이다
세상은 가난하고 시인은 많다
남모르게 날마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
오늘은 그냥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리라
주문처럼 나는 너를 나처럼 사랑한다고
살아 있는 한 사랑한다고
마지막 숨결까지 두근거리는 사랑이라고
너는 내가 가장 나중에 배운 말이다
세상과 나 사이에서
너라는 이인칭은 종종 잊히고 지워진다
아직 사랑한다는 말을 떠올리지도 못했을 때
세상을 향해 던지는 말들은 바람에 떠돌다가
너의 가슴에 박히는 가시가 된다
너는 언제나 나의 상처였다
쉽게 망각되는 사랑의 그늘이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진부하다
시인은 그 말을 남기고 갔다
세상은 가난하고 시인은 떠났지만
진부한 삶은 사랑으로 가까스로 사람을 이어 놓는다
♧ 닭국숫집 서가
여주인은 시 읽기를 좋아하고
닭국수를 판다
손님은 국숫집 서가에 꽂힌 시집들을
곁눈질로 훔쳐본다
무명 시인을 알아보는 이는 없고
닭을 삶아 넣은 국수는 맛이 좋았다
여주인은 국수를 팔고
한가해진 오후엔 시를 읽는다
♧ 시집을 읽다
시인들이 한 세대 빠른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한 세대 느리다.
늦은 나이에 문학상 수상 시집들을 읽는다.
그 동안 나의 젊음은 너무 바빴다, 시 없이도 잘도 흘러간 시간들.
아내는 조금 늙었고 애들은 수숫대처럼 자랐다.
아내는 이제 젊은 시절의 유행가를 조금 느리게 부르고
내 연배의 시인들은 너무 젊거나 늙어 보여서 조금 놀란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시인들은 이제는 절필이거나 지리멸렬이다.
또 어떤 이는 세상을 떴지만, 그래도 조로보다는 낫다.
초로의 시인이 예언가이기 어려운 까닭은
오로지 청춘의 문턱만이 오만한 예언의 장소인 까닭이다.
별과 하늘과 꿈의 사다리를 만든 건 그래도 시인들이다.
그 덕에 나는 조금 높은 꼭대기도 보았고 죽음의 호곡 소리도 들었다.
이제는 다시 저 평지의 언어가 그리운 걸까.
아이들의 말이 새삼 귀에 와 닿고 나물 반찬 씹는 맛을 알 것도 같다.
*진하 시집 『제웅의 노래』 (천년의 시작, 2021)에서
*사진 :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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