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도 4 – 이윤길
수평선으로 몰려오는 검은 구름에서
우르릉거리는 세이렌 노랫소리가
어느 서러운 죽음의 만가처럼 들려왔다
수장 당한 잭타르의 슬픈 울부짖음,
인도양을 떠도는 발자국소리이거나
사이클론에 매달린 질긴 목숨이겠다
물고기들은 재빨리 지느러미를 접고
심연으로 가라앉거나 암초 사이로 숨어
거대한 힘 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한 생명의 사투뿐
퍼런 물방울 속 노무라깃해파리와
번갯불 섬광이 심연을 맑게 비추었다
파도와 파도가 맞물린 채 신음하는
오로지 괴혈병에서 살아남은 항해사와
검은색 황금을 얻고 싶다는 욕망이,
타륜을 잡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늙은 선장 지시를 따라 외친다
하드 스타보드,
하드 포트
♧ 나홀로나무* - 김일연
그 나무가 어디 있죠, 무심결에 묻는다
눈앞의 노거수가 보이지 않나 보다
사람도 이 도시에선 자주 보이지 않는다
사람도 이 도시에선 자주 보이지 않듯이
한철을 다투어 핀 꽃들 소란해지면
하늘을 이고 선 나무는 잘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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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촌토성 언덕의 500년 된 은행나무
♧ 벌교 참꼬막 2 - 선안영
시간이 몰아가는 죽음은 딱 한 방향
함부로 열탕지옥을 휘저어서는 안 된다 순한 양 떼를 살살 몰고 가듯 같은 방향으로 저어 기승전결 비장한 결말을 앞둔 반전의 지점에서 건져진 꼬막, 두 손 모아 공손히 삶은 꼬막을 까다보면 꽝꽝 닫혔던 문들이 열리는 소리, 만능키를 찾은 듯 인생 막장 끝에 세상이 열리는 소리 딸각 딸각
어둠속 별빛 몇 촉 자란
눈동자를 만난다
♧ 더 쓸쓸하면 좋겠다 – 정옥선
쪽빛이 깊어져서 더 슬픈 오월 하늘
스치며 끌어안듯 바이칼을 만져본다
바람이,
일어나지 않는 젖은 눈물을 출렁인다
오늘이 어제보다 쓸쓸하면 더 좋겠다
시간이 깊어지면 그리움도 지쳐갈까
고요한
지구의 오지 푸른 눈이 흔들린다
♧ 꽃신 – 표문순
시동을 끄고 있는 타이야표 보생 고무신
누벼왔던 바퀴의 새카만 이력들이
찰지게 해지지 않는 걸음으로 재생됐다
아버지의 도로에서 찔꺽찔꺽 들려오던
축축한 소음들을 꽃밭으로 일궈놓은
그녀의 얌전한 문장 해바라기꽃 두 켤레
♧ 겹 - 김수우
쓰레기통에서 날아오른 검은 비닐의 춤처럼
자유를 찾아다니는 화살처럼
최초의 얼굴이 도착했다 가난을 업고 온 커다란 고요
바지 자락에 딸려 온 백악기 도꼬마리 씨앗이
먼 길을 보여준다
자기장 밖을 사유하던 그는
늑대와 놀던 시절을 떠나
청동방울에 귀 기울이던 마을을 지나
이젠 당신의 가난을 사유한다
영도 산복도로 플라스틱 텃밭
이끼를 먹고 살던 시베리아 순록이 돌아본다
봉래산 할매바위가 빈집의 안부를 물을 때마다
사막이 된 영혼이 돌아오고
바다가 된 영원이 글썽이고
산맥이 된 두개골이 퍼덕인다
뒤적일 적마다 혓바닥과 눈알들이 튀어나오는 바람의 일기장
늙은 미래도 어린 과거도
서로 낙엽이 되었다가 서로를 다시 낳아준다
당신을 사유하던 모든 부활은
딱 당신의 키만큼 날아올랐다 내려앉는다
빈손은 구름을 의심하지 않아
맨발은 눈물을 시험하지 않아
텃밭에는 가난해야 할 이유들이 뚜벅뚜벅 피어나는구나
몇 년 굶은 예언자가 절대 팔지 않은 고독, 저 고독을
태어났든 태어나지 않았든 길이 멀든 가깝든 방이 있든 없든
가난은
수천수만 겹으로 되어 있다
수천수만 고요로 되어 있다
스스로 죽고 스스로 깨어나는 허공, 척추도 없이
당신을 다시 업는다
*내일을 여는 『작가』 (한국작가회의, 2021년 하반기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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