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도경 시집 '어른아이들의 집(集)'의 시(3)

김창집 2022. 1. 10. 00:41

 

비자림*

 

 문명병을 퇴치하고 지구를 지켜나갈 파수꾼

 비자나무 일가(一家)가 지구의 대안이다

 

 미래 환경을 예측한 이 마을 선조들은 숲의 시조(始祖)를 조성했다

 먹고 버린 비자열매 씨앗에서 싹이 트고 잎이 나고 무럭무럭 자랐다

 

 비자나무집성촌으로 날아든 단풍나무 산딸나무 말오줌때 후박나무 머귀나무 상산 작살나무 박쥐나무 누리장나무 천선과나무 아왜나무 씨앗들이 싹을 틔웠다 나도풍란 콩짜개란은 비자나무에게 집을 빌렸다 소문을 들은 생물이 고유명사로 된 명함을 들고 모여들었다 한 터에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곶자왈**은 품고 나누며 공존한다

 비자나무 뿌리가 머금은 물은 마을 사람들에게 생명수였다

 

 천년의 세월을 함축해서 보여주는 숲

 상처를 딛고 어우렁더우렁 살아가는 풍경이 사람 사는 모습을 닮았다

 

 곶자왈의 생명은 사랑이다

 비자곶***은 사람을 사랑한다 사랑이 사람을 지켜낼 지구의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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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비자숲길 일대.

** 화산이 분출할 때 점성이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바위덩어리로 쪼개져 요철(凹凸)지형이 만들어지면서 나무, 덩굴식물 등이 뒤섞여 숲을 이룬 곳을 이르는 제주 고유어.

*** 비자림의 옛말.

 

 

추도(秋圖)

 

나의 선택을 믿고 싶었으나

끝내 가을을 배웅해야 했다

잡고 싶었던 절기 앞에서 맞닿은 흰 벽

네 마음에서 내리는 눈을 보았다

한겨울 혹한에

온기 불어넣을 자신 없는 내가

네가 물어오지도 못하는 말에

애써 대답했을 때

담쟁이 넝쿨은

흰 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몇 잎 남지 않은 줄기에서 뻗은

천 개의 손이 벽을 붙잡고 있었다

천 개의 눈을 갖지 못한 나는

잡는 것에 집착하다가

쓰러져가는 슬레이트집만 봤을 뿐

뒷마당 텃밭과

앞마당 산수유나무와

마루에 내려앉는 햇살은 보지 못했다

늦가을이 그리는 담쟁이 벽화

관세음보살의 미소를 잡는다

 

 

동백나무 점괘

 

때늦게 돌아보는 것을 뒷북이라고 하지

다시 말하면 앞으로 나아가라는

돌려 말하면 한발 늦다고 채근하는

그러니까 바보 같다는

때 묻지 않았다는

순수하다는

눈처럼 하얗다는

동백나무 입장에서 보면

함박눈 올 때 꽃은 절정이라는

그러니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무더위에는 패나 던지며 점괘나 보라는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마당 동백나무 열매가 튼실해서

면경 속 달뜬 마음이 되고야 마는 것인데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거울아 거울아!

겨울이 오긴 할 거니?

눈 내릴 때 꽃이 피긴 할 거니?

뒷북에 장단 맞춰 줄 거니?

뒷북 소리 들어보긴 한 거니?

거울아 거울아!

 

 

쥐밤나무 아래에서

 

저 멀리 바다로 빠져들던

사과 빛 오메가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처럼

목 늘리던 그 때

 

!

 

꿀밤 주던 쥐밤

한 번으로는 안 되겠다며 다시

 

!

 

쥐어박던

 

 

() 효녀 지은*

 

곧이곧대로 믿는 버릇이 있다

힘겹게 구순으로 향하시는 아버지 말씀이라면

 

병원에 오지 마라. 나 괜찮다.”

 

, 글쎄 오지 말라니까! 코로나 시국에.”

 

전화를 끊고 비행기를 탔다

아버지의 꼿꼿한 말투가 변하지 않아 마음이 놓였다

 

강한 부정이 긍정이었다는 걸

이순의 내가 알은 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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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녀지은 설화의 주인공.

 

 

답가

 

홍의녀지비(洪義女之碑)*라니요

조선 여인에게 언감생심 시비(詩碑)라니요

조정에서 시비에 휘말리실까 걱정되었습니다

 

연지곤지 바르고 족두리를 써야만 지어미인가요

이름 석 자에 형두꽃 씌워주며 빛이 난다 하셨으니

가슴에 별로 새기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황천길 무섭지 않았습니다

배웅이 애끓어 송구하게도 행복했습니다

 

억울할 새 없었습니다

지아비 두고 앞서는 죄인 걱정이 앞을 가렸습니다

 

내 설운 딸과 사위 호적에 올려 돌봐주시고

소인을 양주 조씨 문중 사당에 봉안까지 해주셨으니

지난 한생 여한이 없습니다

 

세세생생 보은의 별로 뜨겠습니다

지고지순한 사랑 이어가겠습니다

세상을 밝히는 사랑의 전도사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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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철이 홍윤애의 묘를 단장했으며, 지금도 그가 짓고 쓴 묘비명이 전해지고 있다.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조정철과 홍윤애참조)

 

 

                    * 김도경 시집 어른아이들의 집()(한그루, 20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