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오승국 시집 '아쉬운 기억'의 시(2)

김창집 2022. 1. 26. 00:20

 

알젠틴에 보내는 편지

 

진정 참다운 세상을 그리워했어

끈질기게 이어온 우리의 삶만큼

사람다운 사랑을 하고 싶었지

 

컴컴한 독방에 갇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사랑아

풀잎처럼 순결한 나의 사람아

 

우리들의 터전에서 산산이 부서지던

압제와 굴욕과 치욕의 시대

배반의 역사는 가다가 멈추고

숱한 어둠을 헤매던 깨끗한 희망은

우리들 가슴속에 켜켜이 쌓여가네

 

 

우리 시대의 장두

   -양용찬 열사에게 바침

 

한라산 자락마다

선연히 안개는 흐르고

투쟁의 연표 위에

서러운 가슴 쥐고 사라진

미칠 듯이 기억되는

그리운 얼굴 있다

 

수눌어 일하고

들불처럼 일어서던

풋풋한 섬공동체

그 싱그러운 우리들의 땅에

개발바람으로 날아와

섬의 숨골에 박힌 특별악법의 말뚝을

스물다섯 젊은 불칼로

단숨에 뽑아버린 당신

 

꿋꿋하게 꾸려온

우리들의 삶을 앗아간

모든 무리들 앞에

한 점 불꽃으로 타올라

승리의 칼이 된 당신

 

죽어서 장두가 되는

서러운 시대의 싸움 앞에서

진솔한 섬놈의 모습으로

우리들 가슴 속에 되살아나는

, 우리의 장두

제주사랑 양용찬 열사여!

 

 

세기말 기억

 

길고 긴 반역의 세월 앞에

다시 새로운 햇살이

헤어진 뭇 영혼의 상처 위에

부서지고 있습니다

 

저 황량한 한라의 들판에서

새 생명을 꾸려가는 질경이꽃과

무리지어 피어나는 억새꽃들에게

패배의 쓸쓸함은 말하지 마십시오

 

화려한 꽃들은 지고 없으나

그 간절한 시대의 언저리에서

가슴과 가슴끼리 피어나던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짓밟힌 정의의 숨결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어오던,

 

그리운 벗들의 얼굴 위로

피투성이 팔십년대의 사랑이

용암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온전한 것 하나도 없는 깡마른 눈물땅에서

어머니의 노동이 물결치던

탑동점령지의 숨비소리는

까마득히 돌아오지 않고

가고 없는 세월과 사람들이

세기말 햇살에 빛나고 있습니다

 

 

지귀섬 연가

 

바다 끝 선연하게 섬 하나 떠서

한결 굵어진 솔가지 끝엔

그리운 노랫가락 머물다 가네

 

허기진 가슴으로 수면에 올라

온몸으로 숨비소리 부르고 나면

기다랗게 누워 있는 지귀섬처럼

이 한 몸 나직하게 물 위에 뜨네

 

천길만길 넘나드는 제비들이사

나뭇잎새 물에 띄워 쉬어가지만

바다 속 저승길에 지쳐온 날들

어디에다 섬을 띄워 쉬어나 갈까

 

봄날의 유채꽃은 하나둘씩 지는데

늘 그 자리 그 모습으로 위안을 주던

지귀섬, 네가 있어 내가 살아왔구나

해진 가슴 투박한 손등으로 살아왔구나

 

해 뜨고 바람 자는 날이면

태왁 망태에 몸을 띄워 어기여차 지귀섬 가자

망망한 바다에서 한 생을 보낸

잠수아낙의 어기찬 노래

지귀섬 연가

 

 

숨비소리

 

한숨 숨비소리

휴우 휴우 휴우

 

터질 듯한 심장에

태왁 띄워

 

천길 물속으로

뛰어 드는

 

제주 바당

숨비소리

 

물위로 떠올라 울음 우는

애절한 노래

 

물질 고행마다

피꽃이 피네

 

 

억새별곡

 

약속된 바람은

스스로 폐허의 들판을 만들어가고

숨 막히던 사연을 가슴에 담아

까마귀 떼 울며 나는

억새에 지고 있다

 

하루의 긴 여운으로

꿈틀대던 삶을 꾸려주던

햇살도 지고

달빛 또한 지고

쓰러짐의 합창에 우리는

슬픔 역사를 떠올리며

혼자는 설 수가 없어

기다란 억새들끼리 부둥켜안는다

 

우리들역사는사람들이야기

억새이야기는억새들의역사

 

널리널리 휘둘러간 할아버지들 설움은

죽창이 되지 못한 옛섬의 흔들림

그 흔들림에 실려

들녘 여기저기서 주저앉아 부르던

억새의 노래는 돌아오지 않고

휘이- 휘이- 바람만 불고

 

 

              *오승국 시집 『아쉬운 기억(도서출판 각시선 049, 20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