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강덕환 시집 '섬에선 바람도 벗이다'의 시(2)

김창집 2022. 1. 27. 00:09

 

새철 드는 날

 

보낼 것 보내고

내줄 것 다 내주어

가난 하지만 부끄럽지 않습니다

 

땅속 깊게 촉수 뻗어 길어 올리고

안간힘으로 햇살 끌어 모으던

날들이 있었기에 넉넉합니다

 

이제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바람이 일러준 대로

구름이 빚어준 대로

작고 느리지만 꼿꼿이

견뎌왔으니 다시

걸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싹 돋을 자리가 간지러워

살비듬 털어내는 입춘 날 오후입니다

 

 

봄풀의 노래

 

짓밟혀 억눌린 서러움쯤

힘줄 돋운 발버둥으로 일어서리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후미진 구석

모로 누워 새우잠 지새우는

목 타는 들녘의 얼룩진 밤에도

가녀린 목줄에 핏대 세우며

흔들림도 꼿꼿이 서서 하리라

없는 듯 낮게 낮게 엎디어

봄을 예감해온 눈빛끼리

밑동에서 길어 올린 자양분

은밀하게 서로 나누면

인동의 단맛 스미고 스며

마침내 열리는 눈부신 봄날

 

 

서천꽃밭*

 

나는 지금 너무 먼 곳에 와 있다

둘러보니 무더기무더기 꽃판이다

이대로 살아버릴까보다, 한 백 년

꽃감관**에게 의뭉이라도 써서 개기면

받아줄런가 몰라

바람이 길 따라 불지 않듯 나 여기

죽었나 살았나 모를 일이다

좋다, 이제부턴 그대의 뜻이다

야윈 시대에 배때기에 치부했다면

살 도려낼 꽃을 다오

불의에 눈 감아 버렸다면

피 마를 꽃을 다오

다만, 이승세계 오장육부 헤가르는

싸움과 탐욕, 죽임과 울음이 난무하였다면

화해꽃 나눔꽃 환생꽃 웃음꽃을 다오

한 짐 가득 짊어지고 돌아가야겠네

봄잠 한 번 크게 잤다 기지개를 켜며

아직은 천천히 오라는 그대의 뜻임을 알아차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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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무속에서 인간 생명의 근원이 되는 환생꽃과 멸망을 주는 주화(呪花)를 가꾸는 꽃.

** 서천꽃밭을 관장하는 신.

 

 

떠도는 섬

 

사는 일이 얽히고설켜

울컥해질 때, 비양도 거기

오름 꼭대기

하얀 등대에 기대고

한라산을 타고 오는 마파람

혹은 태평양을 일렁여오는

하늬바람 소리

실컷 들어보게나

 

우리네 삶도 떠돌고 있었거니

이 섬도 흐르고 있었거니

그러다, 게 섰거라 호통에

잠시 닻을 내려

좌정하였거니

머문다고

고인다고

멈춘다고

굴복이 아니다

 

 

이 섬에 그가 있었네

    -두모악 김영갑을 얘기함

 

포말로 부서지면

쉽사리 달아날

파도인가 했었네

 

한 밤 자고 나면 사그라질

안개인가 했었네

 

외진 섬 귀퉁이에

풀씨로 날아와

척박한 토양에

뿌리 내릴 때만 해도

건듯 불다가 그칠

바람인가 했었네

 

하필이면 여기였을까

그는

 

어디든 깃들어

못 살 리 없겠지만

먼 곳을 돌아 마침내 닿은

유배 일번지에서

 

토종으로 살고자 했네

가진 것 적어도

살 비벼 시린 체온

녹이는 것만으로 한낱

쓰임새가 된다면

 

기다림의 맨 끄트머리에서

막막한 어둠 지나 새벽은

더디 온들 무슨 상관이랴

 

렌즈로 겨냥하는 세상은

황량할지라도

손끝에서 농익은

미세한 떨림이 있기에

 

알 만한 사람은 알 것이네

바람을 그러모아도 향기가 있음을

 

들을 수 있을 것이네

힘줄 돋운 발버둥으로

흘러가는 시냇물의

나지막한 이야기를

 

이 섬에 그가 있음으로

 

 

중덕바당*

 

배고픈 섬

어진 백성들에게

다투지 말고

금 긋지도 말라며

곱디고운 자청비

메밀씨 구해다 뿌리고 가꿔

수제비 한 양푼

넉넉히 끓여주셨는데

저녁상 물릴 겨를도 없이

붉은발말똥게야, 이제

떠나라 하네, 떠나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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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해군기지 건설로 사라진 서귀포 강정마을 앞바다.

 

 

              * 강덕환 시집 섬에선 바람도 벗이다(삶창시선 66, 20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