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강덕환 시집 '섬에선 바람도 벗이다'의 시(3)

김창집 2022. 2. 4. 00:08

 

4.3이 머우꽈?

 

기억 투쟁의 70년을 맞으며

중학원 교복을 입은 아이와

하얀 적삼에

검은 고무줄 바지를 입은 어머니가

동백 꽃송이 가지런히 받쳐 들고

43쪽짜리 포켓북에서 묻습니다

도대체 ‘4.3이 머우꽈?’

43자로 답합니다

 

해방정국 제주에서

탄압에 저항하고

통일 독립을 위해

봉기한 주민들을

가혹하게 학살한

미증유의 대참사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4.3평화기념관 들머리

누운 채 있는 백비를 으라차차

일으켜 세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백비*

 

어떠난

써넝헌디

눅졍

내불어시니게

 

오꼿

일려세와불자녕

 

---

*제주4.3평화기념관 들머리에는 정명(正名)을 기다리며 비석이 누워 있다.

 

*카페 '5670 아름다운 동행'에서

 

육성회비

 

회비를 내지 않아 매를 맞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거였다

오일장에서 깨를 팔아 준다고

어머니가 약속했고, 나는

선생님께 그렇게 전했고, 하필 그날

비가 억수로 와서 오일장이 서지 않았는데

매를 맞은 건

어머니도 아니고, 비도 아니고

오일장도 아닌 왜 나였지?

 

다음 주엔 낼 수 있겠지

이번엔 두 달 치를 한꺼번에 내고

야코죽지 말아야지

회비를 낸 사람을 부를 때

어깨를 으쓱거려야지

변소 청소에서 벗어나야지

낼모레 동동

오일장아, 빨리 오라

 

 

풀무치

 

  빈 몸 하나라면 너끈하겠지만 안아도 보고, 업기도 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잠시 부려 쉬면서도 아들 녀석 건사하며 오름 오르기가 수월치 않습니다 이제야 말을 익혀 노란색, 보라색 풀꽃 이름을 물어오지만 어, , 그래, 대답할 새도 없이 숨이 턱에 찹니다 가까스로 올라간 정상에서 자 봐라, 저 분화구는 네가 태어난 자궁이다 애비의 등을 타야만 볼 수 있는, 심연의 저 밑바닥

 

  분화구 주위를 한 바퀴 돌다가 풀섶에 웅크린, 어미 등에 업힌 애기 풀무치를 보았습니다 녀석이 살금살금 다가가 잡았습니다 멀리 날아가는 습성을 어미는 잊고, 애기는 익히지 못했습니다 한꺼번에 두 마리씩이나 잡았다고 환호하는 사이, 어미의 입가에선 흙색의 진물 흐르고 내 입에서도 단내가 납니다

 

  가만히 놓아주고도 따로는 멀리 떠나지 못해 주위를 서성이는 풀무치 부자였을 거라고 믿으며 돌아온 날 저녁, 녀석은 오히려 나를 어르며 아픈 허리 꾹꾹 밟아줍니다

 

* 산란이 '산전'에서

 

산란이 들판 - 강덕환

 

개월이, 넙거리 너머 궤펜이오름

한라산을 배경 삼아 왠지

산란이라 부르고 싶은 들판에 서면

원래 싸움터였단다, 여기는

 

크엉크엉 우룩맞추던 노루도 숨을 죽이고

생솔가지 뚝뚝 분질러지는 소리에

화들짝 산새들도 몸을 움츠리던

그해 겨울

 

동상 걸려 짓무른 발가락 고름 짜내며

산죽을 헤쳐 소식을 전하던 척후병의

다급한 목소리, 등허리에서 뿜어져 나와

눈밭에 물들이던 시야혈천(屍野血川)

 

볼레나무 열매 한 줌 움켜 먹어 피똥을 싸고

멩게낭 마른 가지로 불 피워 밤새 언 손 녹이던

남원에서 표선에서 조천에서

여기까지 떠밀려온 피난민들의 한뎃잠도

별똥별로 무너지던 숱한 밤

 

겨울 지나 다시 그 싸움터

빈숲에 서면 바람소리에 묻어

김의봉 부대의 암호가 올지도 몰라

아물지 못하는 계절이 흐르는 사이

산철쭉 숱하게 피고 지며 검버섯으로 엉켰다

 

*제주4.3평화공원 전시실에서

 

그릅서, 가게마씀

 

이래덜 오십서

안자리에 앉으십서

다랑곶 더렁굴에서

징준이 함박이굴에서

너븐드르 방일리에서

새비리 모롬에서

 

한날한시에

죽지도 못허영

고넹이동산에서

배염나리 바게밧에서

걸시오름 어스승 곶자왈에서

소개내린 도두리 돔박웃홈에서

오도롱 호병밭에서

이래 돌악 저래 곱악

삐어졍 댕기단 죽곡

 

태 솔아분 디서도 못 죽엉

육지더레 실러불곡

바당에 드르쳐불엉

어떵 되어분처래도 몰르게

좀팍만헌 봉분 하나

어신 영혼님네

 

원미그릇에 수저 걸치곡

청감주 올령

이제사 오십센 청허염시매

하다 칭원허게 생각말앙

도ᄄᆞᆺ헌 안자리로 오십서

 

젖은 옷 이시민

잽찔앙 몰류곡

하근디 뽀삼시민

여점 직산했당

 

그릅서, 이디서 몽케지 말앙

그릅서, 조손덜신디랑

놈이영 궂은 일 어시

잘 살암시랜 골아두곡

아흔 아홉 골머리 굴미굴산

그 질로 우터래 굳장 가민

어리목 미여지벵디

그 너머 족은드레왓광 큰드레왓

거기가 청산이도

서천꽃밭 아닙디가

 

일흔 해, 여든 해

백년이 보디어가도

아직도 눈 곰지못헌

칭원헌 원혼덜

헤쓰곡 가르쌍

그믓 긋잰 허는 싀상

춤 탁탁 박가 뒁

보름질, 구름질에

재게 그릅서

이제 다 털어부러뒁

가게마씀

 

 

                *강덕환 시집 섬에선 바람도 벗이다(삶창시선 66, 2021)에서

 

*강요배 '동백꽃 지다' 중 '한라산 자락 백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