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두천 하늘 아래 1
-꺾인 꽃
꿈꾸듯 출렁이는 미군 거리의 밤
짙은 화장을 한 여인들 허리에 끼고
히히덕거리는 미군병사들
우리들의 삶의 진실은 한갓
달러의 웃음거리로 환산되던
황량한 내륙의 하늘 아래
출출한 비가 내린다
이미 꺾여서 꽃이 된
우리들의 사랑은 결코
순탄히 흐를 수 없어서
멍든 가슴팍을 치밀어내는
거센 역류로 바뀌어 간다
♧ 동두천 하늘 아래 2
-정지된 호흡
한국인 출입금지
보산동 미군거리
내 땅에서 추방당한
황당한 기분으로
냉랭한 가슴속을
더욱 움츠리게 했던
낯선 타자들의 거리를 무작정
터벅터벅 걸어가기엔
차마 뱉지 못할 아픔들이 밀려 왔고
그 야릇한 기운으로
정지된 호흡을 감지하며 나는
아무도 몰래
발길을 돌려야 했다
♧ 동두천 하늘 아래 4
-쓰러진 풀잎
빈약한 얼굴에 뿌려진 미제(美製) 향수가
더욱 역겨움을 자아냈고
꽉 끼인 코트에 들락거리는 겨울바람에
민들레의 야윈 허리는
개망초처럼 휘어졌다
미군병사가 내뱉는 험악한 말들은
산탄총이 되어 온몸에 피멍으로 꽂혔고
동두천 하늘 아래 수많은 민들레들은
피눈물이 되어 지난날의 슬픔들을
삭여 갔다
그 도시에 온통 널려져
이미 쓰러진 풀잎들은
새로운 계절의 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동두천 하늘 아래 6
-사랑을 위하여
강물보다 진한 흐름이 어디 있으랴
강물보다 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강줄기에 띄워 보낸 오랜 그리움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흐르고
느닷없이 뒤바뀌는 마파람에
늦사랑은 언제쯤이면 북에 가 닿을까
익숙할 법도 하건만
강변 아낙들의 비릿한 한숨은
겨울 강물을 타고 어디론가
늘 떠날 채비를 하고
♧ 동두천 하늘 아래 8
-한국적 슬픔
가까이서 멀리, 혹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시대의 아픔이 바람에 실려
능선 곳곳에 숨어 있어
바람이 연이어 바뀌어 불면
재빨리 한국적 슬픔이
날아와 박혀드는 곳
우리가 감지해내는
중부 내륙의 슬픔이란
동찬 냉기를 끊어 먹는 두더지마냥
남북을 서로 노려보는 상실의 눈빛
아니야, 그 서러운 시선보다
비싼 조국의 이름으로
어느새 굳어버린 비인간 지대
♧ 동두천 하늘 아래 10
-다시 만나면
내 나라 내 땅에서 자유롭고자 했네
끈질기게 지켜온 땅 위에서
기름진 가락 우리의 사랑이
흐를 수 없는 메마른 지대의
슬픈 이야기
미군부대 켐프 케이시
카투사 근무 삼 년
수많은 슬픈 이야기를 보고 들었네
거의 대부분 약소국의 비애를
그대여, 세월이 흘러
우리가 무엇이 되어 이리저리 흐르다가
동두천 바닥 보산리에서
우연히 스칠 수 있다면
다시 만나 추억할 수 있다면
그렇게 쓸쓸했던
우리들의 詩(시)를
한국의 유행가를
더욱 슬프고 비장하게
함께 불러봤으면
강렬한 저항의 노래로
* 오승국 시집 『아쉬운 기억』 (도서출판 각시선 049, 20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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