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희정 시집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의 시(1)

김창집 2022. 2. 25. 00:51

 

무안務安

 

  아버지는 나에게 무안務安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

 

  내가 본 무안은 그늘진 생들이 뒤엉켜 발버둥 치는 모습뿐이었다 한여름 베짱이처럼 사는 사내들, 그 여름 이글거리는 그림자 피하지 못한 개미 같은 여자들, 새끼들 노동까지 올려놓아야 밥술을 뜨게 한 무거운 하루의 저울 눈금 사내들은 그 시간 투전판을 전전하다 곤하게 잠든 여자들 목소리를 깨워 동네 한 바퀴 돌고 돌아 누렁이마저 잠 못 들게 했던 시간, 그 시간은 잔설殘雪처럼 녹아내렸다

 

  군불이 더해진 점방은 열기로 울렁거렸다 사내들의 긴 겨울 밤 꿈은 사계의 꽃 중의 꽃을 보기 위해 눈이 충혈 되어갈 쯤 삼팔을 잡지 못한 아쉬움은 여자들을 향했고 끝내 눈밭을 붉게 물들여 놓았다 겨울은 고드름에 매달린 한 방울의 물처럼 여자의 눈물을 흔들었지만 아침은 천연덕스럽게 찾아왔다

 

  아버지가 삼팔따라지를 잡고 돌아온 날, 무안務安에 대해 묻고 싶었다 힘이 있어야 세상을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인지, 힘을 키워 못난 사내들과 여자들까지 끌어안고 가라는 뜻인지, 끝내 입이 떨어지지 않아 무안을 떠나 떠돌고 있는 나

 

  무안을 닮지 못한 여자들, 무안 보다 못한 생을 살았던 사내들, 무안務安은 무안과 상관없는 생까지 끌어안았던, 그 시절

 

 

안개나무

 

  외롭고 쓸쓸하면 안개나무를 만나러 가라 안개가 내리면 하얀 어둠 속에 당신을 맡겨 봐 그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멀리 가 있는지 숲의 정령들은 알고 있다

 

  당신이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도시에 불청객처럼 내리는 안개야 상처에 스며들어 덧내고 후비며 심지어 개인들의 불행을 즐기기도 하지 김 씨가 가짜 안개에 당했다는 소식은 소문이 아닌 사실이야 그는 아직도 자신의 잘 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안개나무는 알고 있어 그의 불행은 인공 안개가 만든 슬픔이라는 것을

 

  새벽 강에 서면 누군가 울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슬피 우는 모습은 자식을 잃은 어미도 아니요, 어미를 잃고 상처까지 덧 난 어린 짐승은 더욱 아니다 그들이 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당신이 잘 못 보았거나 당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남의 불행에 대해 그 동안 무관심 했던 사람이다 잠시 마음을 열고 들어보면 안개나무가 울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안개나무가 강이나 바다 숲에서 자라는 것은 당신의 슬픔이 태어나기 전인지도 모르겠다 기억에 없는 시간, 안개가 세상에 씨앗을 뿌려 뿌리를 내렸다면 그것은 당신을 품기 위해서일 거야 가끔 인공 안개가 우리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지만 그 슬픔을 유지하기 위해 인공눈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개나무는 알고 있어

 

  바람이 불어도 낙엽을 떨어뜨리지 않는 안개나무, 지상이 슬픔으로 만개하면 어느 바다나 강이나 산이나 들에서 수많은 낙엽을 는개처럼 뿌려놓는다

 

 

붉은, 시월 - 김희정

 

  길 잃은 단풍들

 

  시월의 숲을 보았는가 백 년 전 외쳤던 그 목소리가 메아리로 산다 숲길은 삭정이만 남아 더 이상 푸른 잎을 잉태하지 못했다 시베리아 기단을 등지고 남하하는 가지 사이로 나부끼는 붉은 깃발들 소멸과 싸우는 시간을 알리려 봉홧불처럼 산봉우리를 태운다

 

  나무에 매달린 늙은 잎들, 꿈의 애착에 파르르 떤다 투쟁을 연상시키는 바람의 출정기는 잎들을 매장한다 탈색된 수많은 혁명가들 하얗게 질려 각혈을 하다 나무 품으로 돌아간다 혁명을 좇다 산산이 부서진 잎들 저 잎들이 봄의 새싹으로 태어나기까지 나무는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한다

 

  혁명은 늘 한 발짝 늦게 숲에 온다, 그래서 나무가 춥다

 

 

순례의 길

 

대폭발이었다

 

별이 숨을 놓자

어둠은 우주 장을 허용한다

사지四肢

독수리별의 일용할 양식으로 충만했다

우주에 처음 빛을 쏘아올린 날

삼보일배 하며

은하계 저쪽 성지를 향해

걸어갔다

순례를 향한 길, 순간순간

생의 바퀴가 얼마나 삐걱거렸을까

빛을 품었던 지난 기억 뒤로하고

푸른 살갗으로

검은 그림자 파고들 때

새 생명 잉태하는데

한 줌 빛이 되길

간절히 바라지 않았을까

블랙홀이 조등을 밝히자

유성우가 쏟아진다

문상 온 별들 눈시울 붉히고

장례행렬은 수억 광년 이어진다

 

어느 성단의 성자별이었을까

 

 

독살

 

  한가롭다

 

  아내는 로맨스 소설에 빠져 있다 나는 어제 보지 못한 신문을 읽는다 소꿉놀이 하는 딸아이가 남편이 되었다 아내가 되었다 아이가 되었다 일인 삼역을 한다 혼자 놀기 심심했는지 음식을 요리해 아내에게 내민다 아내는 음식을 삼킨다

  “아 맛있네.”

  딸아이는 웃으면서

  “독약을 넣었는데.”

  아내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으윽~, 해독제를 빨리 줘.”

  “없는데. 히히히……

 

  아내가 죽은 휴일 오후다

 

 

뒤란

 

볕이 늦게 찾아들지만

아늑한 곳입니다

생각해보면

나만 그곳을 들렸던 것은 아닙니다

엄마의 눈물도 이슬처럼 앉아 있고

누이의 사랑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숨기고 싶은 이야기가

그곳에 가면 비밀이 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엄마의 하루가 나에게 말을 걸어

뒷걸음질 쳤고

누이의 사랑이

흐느끼고 있을 때

지켜만 보아야 했습니다

위로받고 싶어 찾아갔는데

풀숲 사이로 상처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잠들지 못한 상처를

뒤란은 말없이 품고 있었습니다

 

 

                           *김희정 시집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화남, 201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