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허영선 시집 '뿌리의 노래'의 시(4)

김창집 2022. 3. 2. 00:04

 

세월

 

눈뜨니 온 몸에 붉디붉은 꽃잎이 돋았습니다

밤새 혈관을 돌아 돌아

그리움의 핏물도 이젠 흔적만 남았습니다

모질고 모진 것만 모여서 흐르지 않는 피

얼마나 속울음 울궈 내야

포기하지 않는 희망이 되겠습니까

 

저 홀로 가슴의 바람살 빗발 되어

흐늑이고 흐늑여 더 울궈 낼 눈물샘이 없습니다

유도화 미치도록 물살 지는 젖은 땅에서

그리운 당신의 뼈를 찾습니다

퉁퉁 불은 가슴 맨 땅

얼마나 가슴뼈 흔들어야

한라산 휘돌아온 끈끈이 바람을

재울 수 있는 겁니까

 

이제 건널 수 없는 검은 숲 사이로

들어가 쌓이기만 하고

부서지지 않는

그리운 나라 당신의 나라로 가려 합니다 (1992)

 

 

 

상처

 

네가 오지 않으면 내가 따라 가리라

낙타의 등판으로 굽어가는 어둠 헤치고

산오름 등성이 굽이굽이 건너리라

억새풀 신사라풀 앞세워

반딧불 길섶에 길 트는 모랫길

벼랑 따라 가리라

 

구부린 허기 무럭무럭 자라는

힘살 하나 앞세워

잃을 것 다 잃어 더 이상 무얼 바라나

네가 오지 않는다면 내가 따라 가리라

팔목의 밧줄 하나 묶임 하고서도 (1992)

 

 

 

자운당

 

이 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나

사람들이 내다버린 감자처럼 누워 뒹굴고

누에처럼 꼬부라져 엉킨 죽음들

그도 모자라 푹푹 흙으로 썩어가던 비밀을 아나

 

학교마다 돌밭마다

이 사람을 아는가

입만 벙긋하면 죽던 시절

이 설운 돌밭에선

서러운 사람들의 목소리

밤마다 몰려나와

후두둑 고랑마다 비애가 늪을 이룬 비밀을 아나

 

초여름 신새벽 별도악 갯지렁이

바다의 육신으로 물오른

갯지렁 떼죽음 밟고 올랐다

한때 그런 떼죽음이 있었다

죽어서도 꿈틀대는

그런 비밀이 있었다 (2002)

 

 

 

종달리 소금밭을 지나며

 

부피로 알 수 있나요

어디 온전한 날개 있어

길을 잘못 들어도

소금밭에 뿌려진

희디흰 뼛가루를 볼 수 있나요

버릴 만큼 버린

생각 없이 흔들리는 갈대숲 사이로

여행길 애인들은 끼리끼리 꿈을 날리지만

부당하게 흩어지던 여린 목숨들은

어디로 갔나요 (1992)

 

 

 

비의 숲

 

마음엔 빽빽한 빗발이 그치지 않는데

내 모순된 사랑과 싸우다

숲으로 갔습니다

보랏빛 한라돌쩌귀 귓불까지 웅크려 떨고 있었습니다

귀 밝고 눈 밝은 나무들은 다 안다는 양

나를 비웃습니다

상상나무 비죽비죽 젖은 채로 웃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데, 들키지 않았기에

젖은 채로 울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소리가 들렸습니다

걱정 마라, 아무리 젖어봐라

뼛속까지 젖기야 하겠느냐

오랫적 어머니 말씀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 그루 함께 젖는 것

그 한 그루밖에 없었습니다 (2003)

 

 

 

암석

 

초가을 도너리오름* 화구에 내 헛헛한 심장

하나 묻고 내려올 때

그제야 안 보이던 붉은 암석 하나 솟아났다

비틀리고 서로 뒤엉킨 채 잠 못 들던 수중의 시간

갇혀 있는 시간의 지층만큼

거대한 빛의 덩이와 뒤얽혀 싸워 왔다

싸움을 건다는 건 빛을 그리워하는 마음 당기는 일

보드라운 빛 어둠 수렁을 밀치고 들어가

달래고 달랠수록 새벽보다 강한 힘으로 부서져

펄펄 끓는 시간 속으로 분출했다

덜컥 떨어지던 화산의 눈물

차고 냉정한 시간의 덩이

수천만 년 빛의 세월을 지나 바동거릴 때

봐라, 우레를 감싸던 침묵

검은 빛 몸가린 채 뒤엉켜

저기 저 붉은 색조 띤 빗금 깊이 긋는 오름 위로

저 풀잎 같은 암석

분지에 걸려 일어설 줄 모르는 내 청춘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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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에 위치한 오름으로 돌이 많아 돌오름이라고도 함.

 

 

                    * 허영선 시집 뿌리의 노래(당그래, 200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