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아기를 위한 어머니의 노래
- 남원 '고사리' 김 할머니*
아가야
거친오름 능선이 발딱 일어나 나를 일으켰고
나는 맨발로 너를 품고 사생결단 내질렀다
내 곧 터져 나올 숨소리 막아내며 달렸다
거친오름 낮은 계곡으로 치달을 때
기어이 너는 세상을 열었구나
와랑와랑 핏물 흥건한 바닥에 너를 내려놓고
불속 뛰듯 달려야 했다 아가야
갈적삼 통몸빼에 궂은 피 계곡으로
콸콸 쏟아져 내렸으나
너를 어쩌지 못했다 아가야
내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 몸은, 검붉다 못해 뜨거운 용암덩이
나의 몸은 나의 몸이 아니었다 아가야
용서해라 사정없는 칼바람은
죄업으로 몰아친 내 심장을 가격했다
너를 버티게 해 줄 숲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가야
벼랑 위 심장을 억누른 내 생은 내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냐 내 청춘의 기슭 깊숙이
찔레낭 멩게낭 가시덤불에 긁히며 내려친 것은
2002년 사월 오늘도 고사리 삶으며
내 청춘의 피 흐르던 그날을 생각하면
잊힐 것 어찌 잊히겠느냐 아가야
이렇게도 출렁이는 심장은 다 무엇이냐 아가야
이름도 없었던 네 숨결인 양
한밤중 흐느끼는 거친오름 연노랑 양지꽃
바람 따라 어딘가서 숨 다한 너를 생각한다
등 굽은 고사리에 등 한번 굽힐 때마다 (2001)
♧ 꿈인 거 맞지요
- 상천리 강도화* 할머니
꿈인 거 맞지요. 모진 꿈 한번 꾸었습니다.
스물여섯 청상에
등골 하나 나간 채 살고 있는 것도
험한 꿈 맞지요
살자고 섣달그믐 키 넘은 눈밭 한라산
헤엄치며 올랐던 것도 꿈인 게지요
그해 겨울, 곡절 없이 끌려 간 중문지서
옹이 박힌 화목에 앉은 채로 살 터진 내 등판
순식간에 숨이 톡 끊어져,
죽었는가
한참 지나서야 숨이 다시 새 나오던
머리 등짝 허리 다리 어디 살빛이라곤 없던 내 몸
정신은 삽시에 나동그라지고 숨은 콱콱 막히던
독한 꿈 한번 꾼 거 맞지요
기어 다닐 수도 걸어 다닐 수도 없던 그 겨울
그때 내 뱃속 아기 일곱 달
매 맞는 에미 품에서 꽁꽁 숨죽인 채
질기게 살았던 사내 아이
동짓달 그믐부터 숨은 살고 눈은 팔롱팔롱
4월에 난 그 아기, 뒷해 정월에 죽을 때
아파서 죽어 가도 약 한 첩 못써 본
그 시국 넘은 것 꿈이지요, 꿈인 것 맞지요
명 긴 아긴 사는지
첫 돌 넘은 딸아기도 울지 말라
소리 나면 죽는다
팡하면 죽는다 소리에 숨소리도 안내던
그 시절 넘긴 것
아, 이런 것도 꿈이라면 꿈 맞지요
홍을삼 각시 양성원의 처는 어땠는지 아시나요
애기구덕 안은 채 죽을 둥 살 둥 달렸지요
돌오름 지경 애기 울음
한참 후 나와 보니
애기구덕 안은 채 그녀 죽고
그 애기 서른까지 살다 죽었대요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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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때 남편, 시부모, 시동생, 아들 죽고 홀로 자식 키웠다. 2003년 83세로 안덕면 상천리서 살고 있다.
♧ 그 날
50년 음력 8월 열하루
남편 죽었단 기별 듣던 날
8월 염천에 몇날며칠 넋 나갔다
폐허된 허공만 잡혔다
어둑하면 방에 들었고
밝으면 문전에 비시시 오그려 앉았다, 내리 사흘
아무 말도 못 했고 아무 생각도 없었다
아무 일도 못했고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아이 셋 울며 보챘는지 어땠는지
숟가락은 들었는지 어땠는지 아무 생각 없었다
눈물은 어디로 갔는지
마음은 기진맥진 어디로 갔는지
속이 막히면 뼈까지 바싹 말라 버린다는 것
그때야 알았다
속이 에이면 앞마저 보얗게 안 보인다는 것
아, 그날 처음 알았다.
지금도
한밤중 눈 뜨면 가슴에 것 치밀어
오지 않는 그 사람 기다린다 (2003)
♧ 놋쇠 숟가락
- 문임생 할머니*
눈물처럼 그렁그렁 별빛 쏟아지고
달만 비룽비룽 천지가 새하얗던 한라산
정신마저 와르르 덤불더미 속에 숨은 시절
한밤중에 손톱 불며, 멩게낭
마디마디 숨죽여 끊었지
목숨 걸고 배급 받은 조 두 되
산지사방 바람소리 외치는데
흐릿 관절 시부모님, 여섯 살 아들
좁쌀 끓여 엿새 주린 곡기 채웠으니
어디 좁쌀 먹고 눈 똥이 힘 있었겠나
이유도 없이, 기세 등등 명령 따라
동부두 주정공장 60일 사는 새
젊은 남편, 대전형무소 7년 형
1년만 기다려라, 바람처럼 핑 사라져
행불 50년
매일 아침 더운 밥 한 사발 올렸다
사발에선 늘 모락모락
남편의 눈물 바람 흘러 내렸다
아무것도 모른 것이 죄였던
산다는 것 하나로 참아 내던
검은 세월
끼니마다 놋쇠 숟가락 하나 닦았다
반짝반짝 닦고 또 닦았다
부재중 소리 내는 놋쇠 숟가락엔
숨은 시절
이산 저산 흩어진 살과 뼈
한 갈래 흙으로 덮지 못한
설운님들 소리가 푸른 녹으로 피고 있다
폭풍 같이 엄습한 숱한 목숨 보면서도
짐승인 듯 식량만 찾던
지금도 와당탕 가슴 치는
숨은 시절 살고 있다 (2003)
♧ 화옥이 할머니
갯 바윗돌 위에 내가 앉았다
또 하나 나처럼 앉은 외로운 그림자 있다
저녁 야위어 갈 때
이따금 나를 부르는 유월의 그 향내였다
연대 바닷가
이곳에선 저 건너편의 동귀리
양화옥 할머니의 파란색 양철 지붕도 보였다
지금 그 지붕 아랜
여든은 족히 건너셨을 할머니
청춘에 잠수하듯 물길 헤친 육지 형무소
지아비 살과 뼈 조각조각 맞추고 건너 왔다는 그녀
검은 잠수복 여전히 출렁이겠지
갯 바윗돌 틈새로
갯메꽃 그 여린 분홍꽃 잎사귀
바람에 한 귓불 슬쩍 구부러졌다
메꽃 술 사이로 퍼덕인다 화옥이 할머니
문어발처럼
완강한 오리발 끼우곤 기어이 숟가락 건네셨지
올 수 없는 사랑 하염없이 기다리며
화옥이 할머니
오늘도 풀죽 같은 우뭇가사리 솥단지
휘휘 젓고 있을까 (1998)
♧ 가문동 할머니 가슴엔
넓적 떡갈잎 한 장만한 얼굴
그녀는 아직도 가문동 할머니
자오록한 눈꺼풀 세상 가리는 그늘
생의 이른 아침도 빼앗겨 화구호 가슴 젖힌 채
지평선으로 낸 선창에 앉아 있다
좋은 날엔 고동 군단이 물 밖 구경나와
검은 갯바위에 바리바리 꼬물대며
검불 덮인 눈마을을 즐겁게 해주었다
열아홉 친친 가슴 동여맨 채 넙패라는 해초만 먹고
일주일간 숨었다던 그 때 그해
금덕리 처녀의 바다는 어디로 갔을까
손깍지 낀 무릎 사이로 아직 못 떠나는 청상의 흉터
더 또렷하기만 하다
깊이로야 바다 심장만 못하겠느냐
물길의 깊이만 못하겠느냐
가슴 한켠 토갱이밭에 쇠비름 자랄 대로 자라
바람만 숨 가쁜 초옥
붓꽃내도 세월 함께 떠났으니
그녀 이제는 만만하다 해송등걸
휘어지면 휘어지는 대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낡은 대문처럼
아무도 그녀안의 섬에 닿으려 하지 않았다 (1999)
* 허영선 시집 『뿌리의 노래』 (당그래, 2004)에서
* 사진 : 파파빌레의 자연석 석상들(2022 .3. 6. 필름크레인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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